▲ 이회영.
이회영(李會榮)은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로 호는 우당(友堂)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의 형(兄)이다.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이며,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7형제 중 4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유교가 뿌리 깊은 양반가문의 출신답지 않게 젊어서부터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에 민감했다. 그는 곧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게 감화 받고 교회에 출석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특히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우국독립지사들과 교유를 맺었고 독립협회 등에 가담해 이상설, 여준, 이상재, 남궁억, 여운형, 정인보, 안창호, 장덕수, 신석우, 이승만 등과 구국운동에 동참했다. 1906년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의 핵심멤버로 참여했고, 신민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이 일어나고 사태가 더욱 긴박해지자 중국 국민당 간부들을 만나 장차 독립운동에 대한 협력을 요청해 무기 및 재정적인 협조를 약속받았다. 동년 11월 이회영은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과 만주 주둔 일본국사령관의 암살 등을 목적으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 여행을 단행했다. 그러나 대련항에 도착할 당시, 밀정에 의해 정보를 입수한 일본 수상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66세의 노구에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 끝내 한국독립지사의 투혼을 지킨 이회영은 일제에 의해 혀가 잘리고 온몸이 난자당한 모습으로 1932년 11월 17일 옥사하였다. (기독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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