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훈 교수(합신대)

 
그리스도 공로만 의지하는 확신

신앙적 윤리 열매 맺지 않는 믿음은 거부…개혁신앙 정수 보여

 

▲ 김병훈 교수
종교개혁시기와 그 이후 개신교정통주의 시대에 나온 신앙문서들은 예외 없이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철저히 강조하고 있다. 개신교 신학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면 이것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다.

종교개혁을 모태로 하는 개신교 신학은 가톨릭 신학을 상대로 하고 있다. 16~17세기 가톨릭 신학-지금도 그 신학 기조가 전혀 변함없지만-은 중세 후기에 절정을 이루는 세미-펠라기우스적인 신인협동론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신학에 기초하여 전적인 은혜의 신학체계를 세워가는 개신교 루터파 신학과 개혁파 신학은 ‘오직 은혜로만’의 신학을 표방하는 신조를 세우게 되었다.

1563년에 출간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도 당연히 ‘구원하는 믿음’에 관련하여 가톨릭 신학의 오류를 시정하고 성경의 교훈을 제시하는 교리를 완성도 높게 제시하고 있다. 중심 초점은 ‘오직 은혜로만’의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만’의 고백을 통하여서 전달할 때에만 참된 은혜의 신학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부여받는 방식이 오직 믿음뿐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접붙임을 받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을 받아 구원을 받는 일”은 오직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뿐임을 천명한다.(문답 20) 참된 믿음이라야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데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참된 믿음이란 어떠한 믿음인가에 있어서 견해가 갈리며,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유가 자리한다.

참된 믿음은 가톨릭이 말하듯이 사랑이나 순종과 같이 공로를 인정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이 교훈하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들이 진리라고 동의하는(assentior) 분명한 지식(notitia)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뿐 아니라 내게도 또한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그저 은혜로 하나님에 의해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확고한 확신(fiducia)”이다.(문답21) 즉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하는 확신을 요소로 가지고 있는 심리적 차원의 믿음이지 어떤 행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성령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다.(문답21,60) 따라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의 믿음은 사람이 주관적으로 스스로 다짐하는 어떤 각오나 신념이 또한 결코 아니다. 즉 오늘날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긍정의 힘’이나 ‘하면 된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가톨릭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개신교회의 주장이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자랑하는 명목상 신자를 만들어내는 죄악을 범한다고 강력히 비판을 하였다. 이러한 비판이 지적한 위험성은 사실 개신교회 역사를 살필 때, 불행하게도 전혀 이유가 없는 비판이 아닌 듯이 보인다. 개신교인들 가운데 비윤리적 신앙 양상을 상당히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양은 개신교인들 가운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인들은 물론 모든 종교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다.

개혁교회는 가톨릭교회의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사람이 “선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거나 아니면 부분적으로라도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될만한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만 하는 데” 사람 가운데 그런 의를 이룰 수 있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문답62)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율법의 의를 부분적으로라도 이룰 수 없는 무능력한 자라 할지라도, 결코 선한 일에 무관심하거나 사악하게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가 없음을 확실하게 교훈하며 천명한다.

그 이유를 크게 두 문답을 통해 제시한다. 하나는 구원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문답64) 또 다른 하나는 죄인을 구원하신 목적과 관련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속하신 까닭은 “성령으로 죄인을 새롭게 하시어 그를 닮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을 제시한다.(문답86) 이러한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찬양하도록 하며, 구원을 받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확신케 하며, 또한 다른 이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영적 유익을 누리게 한다.

이러한 교훈에 더하여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만일 이러한 회개와 감사의 선행이라는 영적 열매를 확실하게 맺지 않는 사람은 단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가톨릭의 비판을 일축한다. “음란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강도질하는 자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명목상으로만 신앙을 유지하는 거짓 신앙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문답87)

결론적으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이 교훈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한편으로 가톨릭에 대항하여 사랑이나 순종과 같은 공로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하는 확신인 것을 천명하면서, 또한 다른 한편으로 믿음을 단지 지적인 동의로만 이해하는 샌더메니아니즘(Sandermanianism)에 대해 반대하면서 신앙적 윤리를 열매 맺지 않는 믿음을 명확하게 거부한다.

이러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믿음의 이해는 개혁신앙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후의 모든 개혁신앙문서들의 신학적 선조가 되고, 오늘날 부실화의 위험을 심각하게 겪고 있는 조국 교회의 신앙양태의 허점을 바르게 잡는 처방이 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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