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박사(G샘통합암병원 원장)
평생 낄 색안경을 준비하신 하나님
(성경적 세계관)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내가 잘못한 일이긴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수준의 야단을 맞고 마음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아버님이 근무하시던 학교를 다녔는데 그날은 정말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억지로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교무실 사환을 통해 나에게 쪽지가 전달되었는데 그것은 아버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화내서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내용의 짧은 글이었다. 이 쪽지를 통해 내가 잘못했던 일 때문에 아버님께 어색하고 어려웠던 마음을 훌훌 털 수 있었고, 아버님이 내 잘못을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아들로서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경험은 힘겨운 인생길을 걸으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을 때마다 나에게 평강과 안정감을 주는 ‘복음의 유비’로 남아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문과 이과 반을 배정하기 전에 적성검사와 카운슬링을 해주는 학교였던 덕에 내가 인문학 쪽에 월등한 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통사고 이후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렇게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나의 학창시절은 신앙과 학문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지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군사독재 하의 암울했던 시대에 대해 신앙이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복음의 통전성을 무시한 채 개인 구원으로만 복음을 이해시키던 당시의 보수 교회에서 답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왜?’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을 허락해 주셨다. 아버님을 따라 전주로 이사 와서 다니게 된 전주동부교회는 학생부가 활발한 교회였던 것이다. 이 때 형성된 신앙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연결되어 서로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다.
대학부 학생회장 시절에는 후배들에게 전공 분야에 따라 학문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글을 쓰도록 독려했다. 도서관에서 논문을 찾아 공부하게 하고 토론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책이 별로 없었던 탓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광화문에 있던 <생명의말씀사> 원서부에 종일 죽치고 앉아 책을 읽기도 했고, 점심 밥 값을 아껴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지금 생각해 보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학술발표회도 하고 논문집을 내기도 했다.
이 때 접하게 된 헨리 모리스(H. Morris)와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의 책들은 나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모리스는 하나님의 창조를 지성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자 나머지 질문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쉐퍼의 저서들 또한 나에겐 더 없이 중요한 책들이 되었다.
의과대학에서 6년 동안 함께 한 아내와 결혼한 후,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를 주석한 ‘창세기의 시공간성’을 함께 공부하며 우리 부부가 공유할 세계관을 다지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된 성경적 세계관은 내가 의사로 살아오는 동안 상처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와 그 기원, 시작, 생명의 가치와 종말에 대한 기준을 지시하는 시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