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홍천 모곡리 무궁화마을에 세워진 남궁억의 동상과 기념관(뒷편).
기독 애국인 남궁억(南宮檍 1863. 12.27.~1939.4.5.)은 구한말 정치인, 언론인, 민족교육가로 호는 한서(翰西)이다.

서울에서 중추도사 벼슬을 지낸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1883년 한성 영어 학교에 입학함으로 개화노선을 택하였다. 졸업 후 외교고문으로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 밑에서 일을 했고 1886년에 내부주사가 되어 어전 통역원이 됨으로 정식 관리가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를 수행 미국을 다녀왔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게 되자 독립협회의 총무가 되어 민(民)의 편에 서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순수 민간 언론지인 <皇城新聞> 창간에 가담하여 사장이 되었고 탐관오리와 부패한 정부관리 및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여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한국기독교인물100년)

국권피탈 이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 슬퍼하던 중 1918년 선향인 강원도 홍천 보리울(牟谷)으로 낙향, 이후 1939년 별세하기까지 20년을 보리울에서 살면서 무궁화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워 ‘무궁화마을’을 조성하였다. 1922년에는 이곳에서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남궁억을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시켜 1933년 체포하였고 1935년 병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무궁화마을은 쑥밭이 되어 있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 밑에 묻어서 거름이 되게 하라.” 임종 시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상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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