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재 500회 맞은 ‘문소재’ 신세원 목사

 

2002년 3월부터 한국교회 부흥·아픔의 현장 생생히 기록 ‘큰 호응’

50여년 공들인 역사자료 수집의 결과물… “열정 회복 계기됐으면”


구한말, 중국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이 망태기로 변신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쇄국정책으로 기독교 전파가 어려웠던 1883년, 백홍준은 만주에서 번역된 쪽복음을 국내로 들여올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백홍준은 연구 끝에 성경책을 한 장씩 풀었고, 그 종이를 돌돌 말아서 노끈으로 만들었다. 그는 노끈 성경으로 망태기를 만들어 등에 짊어지고 국경 수비대의 감시를 뚫었다. 무사히 입국한 그는 다시 노끈을 풀어서 조심스럽게 다리미질하여 성경책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한국교회 120년 역사의 소중한 기억 하나 하나를 다듬어 후세들에게 전달해 주는 목회자가 있다.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신세원 목사(창신교회 원로), 그가 <기독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교회사 이야기 ‘문소재(文巢齋)에서’가 11월 14일자로 500회를 맞았다.

문소재에는 ‘교단의 명칭’ ‘총회와 연합회’ ‘한국 최초 총회 성찬식’ 등 초기 장로교의 면모와 ‘한성감옥의 신자들’ ‘연보 벌금’ ‘한국 최초의 성가대’와 같은 교회사가 깔끔한 문체로 소개돼 있어, 마치 그 당시 현장 속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하기까지는 수많은 신앙 선배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들의 기도와 열정을 본받기 바랍니다.”

일러스트=강인춘

신세원 목사가 신문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02년 3월. 햇수로도 만 10년째다. 이 세월동안 신 목사는 사료와 고서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왔다. 한국교회가 신앙 선배들의 신앙을 다시금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기에 원고 하나를 넘길 때에도 기도와 떨리는 마음으로 진행했다. 고서와 전문 사전을 뒤적여 애써 초고를 써놓고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일주일에 원고를 일곱 번 다듬는 일도 있었다.

“역사의 기록은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관련 사료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 다니기도 했지요. 여기에 기독교적이고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500회, 10년을 달려오면서 주변의 격려와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초기 교회의 ‘날(日)연보’에 대한 글을 본 탄자니아의 선교사가 교인들에게 날연보를 소개해 교회 사역에 활용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보물처럼 간직하던 초기 한국교회의 유물을 선뜻 내놓기도 했다.

문소재는 신세원 목사가 50여 년 공들여 온 고서 수집의 산물이라 더 값지다. 신 목사는 1955년 총신에 입학하면서 남산에 있던 기독교박물관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때부터 각종 총회 자료와 기독교 고서, 사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그가 사역하는 교회 인근엔 고서촌이 있었다.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 시절에는 인사동 고서촌이 바로 앞이었고, 대구 문화교회 담임목사 시절에도 교회 근처에 고서 골목이 있었다.

먼지 쌓인 고서 더미들을 뒤지느라 몇 시간씩을 보내기도 했고, 고물 장수에게 밥을 사 먹여가며 고서와 사료들을 모았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넝마주이’였다.

“30대 젊은 시절에 헌책방을 자주 뒤졌습니다. 그러던 중 책방 쓰레기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이샹한 말삼’이란 제목 밑에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지입니다.”

또 한 번은 어느 목회자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유가족이 그의 유품을 불태우는 현장을 목격했다. 불더미 속에서 옛날 주보 한 장을 발견한 신세원 목사는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고이 모셔와 액자에 담았다. 그 주보에는 일제 말기의 교회 주일예배 순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순서지에는 헌금을 두 번 한 것으로 나옵니다. 한번은 주일헌금이고, 한번은 국방헌금이었습니다. 주일헌금은 하나님께, 그리고 국방헌금은 일본제국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숨기고 싶었던 한국교회의 치욕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모은 역사의 단편은 8000개로 늘어났다. 신세원 목사는 고서와 사료들을 모아 2005년 총신대학교 문소기독교박물관에 기증해 후세들의 권학을 돕도록 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한국교회의 역사가 퍼즐 맞추기처럼 하나로 엮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소재를 한데 모아 교회사 이야기 책 두 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문소재를 500회 연재하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다. 손때 묻은 성경책 속에서, 헤어진 전도지 한 장 속에서, 녹슨 종탑에서 신앙 선배들의 절실했던 믿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원과 방청 남녀가 기쁨으로 열심 연보하니 1백원, 내지 1원, 시계, 반지, 안경 등속으로까지 연보한 합금이 1800여원에 달한 중 직입이 500원이요(제7회 총회 회의록 16,17쪽)라고 기록되었다.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바친다는 것은 눈을 바치는 것과 일반이었다.” (문소재에서 205회. 안경연보)

신세원 목사는 한국교회가 풍요시대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신앙의 열정과 순수성은 희석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문소재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아무래도 물질 생활은 현재가 좋지만 믿음은 옛날이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초기 선교 때의 믿음을 간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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