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천석 목사(예닮교회 동사)

▲ 윤천석 목사
2007년 7월 10일 현 교황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생겨난 그리스도 공동체들은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문서를 발표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 속에는 과학과 영합하려는 가톨릭의 교묘한 음모가 숨어 있다. 현대 문명과 사이버 시대를 겨냥한 교황의 발표에 대해 오늘날 개혁교회는 그 의도를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1992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해서 중세 교회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명예를 회복시키고 과학과 화해를 한 바 있는데 현 베네딕토 교황은 바오로 2세 선언의 연장선에서 더 적극적으로 치고 나선 것이다. 교황청의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가톨릭 신학이 자연신학(theologia natulalis)이기 때문이다. 자연신학은 인류 시조인 아담이 타락하기 전 순수한 이성을 강조하고 그 이성으로 하나님을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과학’을 수용한다. 과학+수학+기술이 결합된 현시대 문화 즉 사이버 문화가 결코 가톨릭에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황은 과감하게 시류영합을 시도한 것이다.

한 예로 중세 가톨릭을 비판하는 <바늘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아 있을까?>라는 논쟁에 대해서 현대과학은 이제 한 점 위에 올라앉을 수 있는 천사 숫자를 헤아리는 행위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하면서 바람막이를 해준다. 중세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과 문화를 주도했던 것처럼 현 시대에는 과학이 모든 학문과 문화를 지배함으로써 과학이 중세 사제들처럼 “과학적 사제직”(scientific priesthood:유럽근현대지성사」)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과학이 사제들처럼 우리 삶과 정신을 재인식하도록 만들고 있기에 화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은 과학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에코(Umberto Eco)는「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고 의문을 던진 것이다.

얼마 전 히트를 쳤던 ‘라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등은 중세 세계관을 잘 반영하는 문학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중간계’는 연옥이라는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이버 공간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연옥 공간과 비교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즉 스티븐 잡스가 죽었을 때 “스티븐 잡스 천국에 로그인”이라고 언론은 보도한 바 있는데 이러한 사고가 하나의 사례다. 하나님 절대주권이 지배하는 천국도 이제 로그인해서 연옥처럼 들락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 일러스트=김빛나
자연신학인 가톨릭은 현 시대 문화와 화해하기 위해 오감(五感)중에서 시각(visual)적 인식을 중심으로 만난다.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제1감각이라고 말하고 아퀴나스가 수용한 것이다. 이후 가톨릭은 타락의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에 대한 유용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쇄술을 통해 성경이 보급되어 중세 말기 개혁의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사이버 공간을 통해 개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세가 인쇄술을 가지고 맨 먼저 인쇄한 것은 면죄부였다.

현대 교회는 이 점을 잘 기억하고 책임있게 말해야 한다. 매기 잭슨(Maggie Jackson)은 2008년 디지털 정보로 인한 혼란으로 ‘新중세 암흑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영문학에 봉직하다가 은퇴한 임철규 교수도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이 있는 한 인간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나아가 “예수님을 닮으려는 울고 있는 눈만이 이 야만스런 역사를 멈출 수 있다”고 호응한바 있다.

지금 사이버 문화와 개혁 교회는 첨예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개혁교회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때문에 감격하며 하늘을 보는 눈은 있는가? 성경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은 5300여 회 나온다. 이 말은 여호와의 말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13:9, 13:43, 막4:9, 4:23, 눅8:8)라고 누차 말씀하셨다.

칼빈은 중세교회를 비판하면서 “교리가 순수할 때는 교회가 형상물을 거절하였다”(「기독교강요」1권 11장 13절)라고 말했다. 이제 개혁교회는 눈에 보이는 형상들을 거절하고 단순하고 순결한 쉐마를 통해 주님을 향해 우는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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