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선교사 입국과 장로교 설립(1884~1900)

 
조선 복음화 ‘순교의 피’로 시작되었다

알렌 이어 선교사 입국 잇따라…한국 장로교·근대문화 기틀 놓아

1900년 조선 땅에서 쓴 어느 무명 선교사의 편지

▲ 알렌 선교사
조선 땅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펜을 든 사람이 많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형제들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이는 형제들이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함입니다.

 조선에서의 복음 전파는 순교의 피로 시작됐습니다. 1866년 웨일스 출신 장로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1840∼1866)는 중국에서 미국 선적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땅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중국어로 된 성경을 나눠주다, 배가 좌초돼 조선인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쓴 마지막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풉니다.” 쑥섬이라 불리는 작은 섬의 숲속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조선 선교의 분위기가 움튼 곳은 조선 땅 북쪽의 만주라는 곳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1842∼1915)는 1874년 그곳에서 조선인 이응찬이라는 어학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응찬과 친구 세 명은 로스 선교사의 처남인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마침내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한
<예수셩교전서>를 간행했습니다. 이 한글성경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했고, 기독교 진리를 좀 더 알고자 직접 로스 선교사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84년 집안현 조선인마을을 찾아 7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1885년에도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 번역은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879년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에 참여하던 조선인 서상륜은 1883년에 모국 선교에 헌신을 다짐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10권 정도의 쪽복음을 들고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서상륜은 다시 의주로 옮겨 복음을 전하다가, 1883년에는 발각을 피해 동생 서경조 가족과 함께 황해도 소래 마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던 중 1884년에는 로스 선교사가 조선 외교 고문관 묄렌도르프를 통해 준 6000권의 복음서를 받아 전도에 힘쓴 결과 1887년까지 300명의 신자를 얻게 됐습니다. 당시 서상륜이 살던 집은 조선 땅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되었습니다.

조선 땅에 첫 번째 선교사로 들어온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이었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1884년 9월 20일 조선에 입국해 처음에는 조선 주재 해외공사 부속의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돼, 왕실의 도움을 받게 되고, 1885년 4월 10일에는 광혜원을 개설했습니다. 광혜원은 의술로 조선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좋은 도구가 됐을 뿐 아니라, 입국한 선교사들이 선교를 준비하는 거점으로도 사용됐습니다.

알렌 선교사가 입국한 지 7개월 후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제물포항으로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성경번역과 선교확장, 교육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해 성경번역사업에 몰두했으며, 자신이 비록 미국 북장로교 소속이었지만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조선 선교에 나서는데 직간접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교육분야에도 노력을 기울여 경신학교(1885)와 연희전문학교(1899) 설립에 힘썼습니다. 또 1887년에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14명이 모인 가운데 ‘장로교 정동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새문안교회로 불리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 장로교의 기틀을 놓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알렌 선교사 부부와 1885년 입국한 헤론 선교사 부부와 함께 1885년 6월 21일 조선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어 1889년에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입국하자 함께 ‘미국북장로회 미슌 반 빅토리아 미슌 연합공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장로교 선교회들이 함께 협력을 통해 선교사역을 추진하도록 한 것입니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조직되자, 1893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함께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슌 공의회’가 조직됐습니다. 이 공의회는 1898년 캐나다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조선야소교 장로회 공의회’로 확대 개편됐습니다.

선교사들로만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는 처음에는 치리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협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고 이 공의회를 통해 실질적으로 중요한 현안들을 다루고, 선교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 성경번역, 자립·자치·자전을 통한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 그리고 효율적 복음 확산을 위해 선교지 분할 정책이 그것입니다. 1893년에는 감리교와도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를 담당하고,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부산과 경상남도,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도를 담당했습니다. 감리교는 주로 중부 지역을 담당했습니다.

이들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 땅에는 복음이 놀랍도록 확산됐고, 자연스럽게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장로교 교회도 잇따라 생겨 1893년 19개, 1894년 12개, 1895년 18개, 1896년 25개, 1897년 33개, 1898년 19개, 1899년 19개, 1900년에 46개 교회가 설립됐습니다. 특히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평양과 서북지역의 복음화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1894년에서 1895년 사이 286명이었던 세례교인이 1899년과 1900년 사이에는 3690명으로 증가했고, 13개 처소였던 교회도 542개로 늘어났습니다. 이 같은 서북지역의 부흥은 그 지역이 조선 교회 성령운동의 진앙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낳게 합니다.

1900년 새로운 한 세기가 밝았습니다. 아직 조선 땅은 메마르고 가난합니다. 우리를 향해 서양 귀신이라는 손가락질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 땅이 머지않아 은총이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조선을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문안을 함께 전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삼았고, 조선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진 왼쪽부터 소래교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 순회선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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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순회선교를 아십니까?

‘맨투맨 사역’ 초기 복음 확장에 결정적 역할


초기 복음의 확장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순회선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의 마을은 수십 혹은 수백 가옥으로 이뤄진 작은 촌락이라 순회선교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순회선교에서 전도와 세례를 베푸는 일 외에 병을 치료하며 조선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갔다. 또 어학선생을 통해 배운 말들을 전도를 통해 사람들과 부딪히며 실제 자기의 언어로 만들어갔다.

순회선교 길에서 선교사들이 나눠준 소책자와 쪽복음은 복음의 접촉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시선이 두려워 노방에서 설교를 듣지는 못하고, 쪽복음과 소책자들 집으로 가져가 읽었다. 장대현목사를 담임한 길선주 목사도 전도지 한 장으로 회심을 했다.

순회선교는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을 로스 선교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온 서상륜에게 많은 소래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887년 가을 개성, 소래, 평양, 의주까지 순회선교를 떠났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순회하는 길에 유숙하는 여관집에서 구경꾼들에게 성경을 그냥 주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때로는 약을 주기도 했다. 두 번째 순회선교는 1888년 봄 아펜젤러 선교사와 동행했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으나, 조선 정부의 금교령 소식에 순회선교를 도중에 중단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언더우드 선교사는 릴리아스와 결혼하고, 그해 봄 세 번째 순회선교를 떠났다. 방문지는 개성, 소래, 평양, 의주, 강계 등이었다. 언더우드 부부가 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푸른 눈의 이방인들 둘러쌌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들의 호기심에 맞춰 질병 등에 필요한 책과 물품들을 제공하며 복음의 접촉점을 삼았다. 의주에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세례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 중에는 세례만 받으면 물질적으로 풍요한 외국인을 붙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구약과 신약의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 후 33명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변화, 믿음의 결실을 맺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세 번째 순회선교에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16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했고, 600명 이상을 치료했다.

감리교 선교사들도 순회선교를 통해 한국 실정을 파악하고 선교 계획을 세웠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8년 8월 북감리교 선교사와 함께 15일간 강원도 원주를 거쳐 대구, 부산을 순회했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들은 1890년까지 충청도, 강원도 일부, 영남지방의 주요 도시는 선교사들의 순회했다.

순회선교는 이후에도 계속돼, 1891년 게일과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일대를 순회했다. 또 봉천까지 가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기도 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 순회선교의 목적이 전도, 어학공부, 지리와 주민에 대한 연구, 의주와 만주 등에 산재한 한인촌에서 시작된 선교사역을 답사하는 데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외 북장로교 선교사 스왈른과 감리교 선교사 맥길은 1896년과 1897년, 관북지방을 순회했으며, 호남지방은 1892년과 1893년 사이 이눌서와 테이트 선교사가 전주와 공주를 순회함으로 선교가 이뤄졌다. 함경도는 1899년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이 순회선교를 함으로 선교사들은 전국을 다 돌아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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