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행복전도사로 불리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행복을 소재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인기강사였으며 텔레비전에도 자주 등장해 지명도가 높았다. 거침없는 입담과 노란 머리에 백바지,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파격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자살 소식은 괴리를 느끼게 한다. 어찌보면 그의 긍정적 생각과 행복한 웃음 뒤에는 육체적 고통과 말 못할 고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남들에게는 행복하라고 해놓고 정작 자신은 그 실체를 잡기가 힘들었나 보다.

그의 죽음을 두고 네티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추모와 비난의 글들 속에는 행복은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와 분수 있는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얼마간의 욕구 충족은 필요하다는 내용들이었다. 최소한 그가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면, 또한 행복과 자살이 서로 극한 대립관계가 아니라면 이 같은 논란은 무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김동인이 1930년대 발표한 <무지개>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무지개의 화려함에 빠져 그것을 잡으려고 떠난 소년이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꿈을 접으려 할 때 갑자기 그는 흰머리의 노인으로 변한다는 내용이다. 화려한 이상만 쫓다가 갑자기 현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늦는다는 인생의 허무함과 삶의 덧없음을 교훈하고 있다.

사람들은 행복을 실존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행복은 역시 잡힐 것 같으면서 잘 잡히지 않는다. 사랑이란 말 다음으로 흔하고 평범하지만 갖기 어렵고 느끼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그러나 허공에 떠 있는 무지개와는 다르다. 원하고 갈망하다가 소유하고 느끼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성추행의 덫에 걸려 희생됐다. 남이 놓은 덫인지 스스로의 덫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회자라는 신분에서 윤리적 파문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행복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자살을 선택한 것이나 신성한 복음을 말해야 하는 목회자가 추문에 휩싸인 것이나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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