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10회 세계 칼빈신학회 참관기 - ③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의 만남-제네바

정기적 ‘목사모임’ 통해 교리 수호·지속적 연구토론 실천
성경해석을 신학핵심으로 이해, 구체적 삶에서 교리 구현
칼빈·불링거, 출발점 달랐지만 성경근거한 공통분모 공유

▲ 세계칼빈신학회에 참석했던 한국칼빈학회 회원들의 모습. 이번 칼빈신학회에서는 칼빈의 신학이 책상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 일구어진 것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지난 2회에 걸쳐서, 2010년 8월 남아공에서 열렸던 제10회 세계칼빈학회는 어떤 학회인지를 알아보았고, 또 칼빈 학계의 국제적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에 근거해서 이번 호에서는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최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향인,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현장과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세계 칼빈학회의 주요 논문들을 고찰할 것이다.

▲ 안인섭 목사
1.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 칼빈(Calvin, 1509~1564)과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개혁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개혁주의 정체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16세기 스위스 개혁주의의 양대 산맥은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으로 나누어진다. 이때 프랑스어권 개혁주의를 대변하는 것은 칼빈이다. 독일어권 개혁주의는 쯔빙글리와 그의 후계자인 불링거에 의해서 대표된다. 따라서 칼빈과 불링거의 신학적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개혁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남아공 세계 칼빈 학회에서도 칼빈과 불링거의 신학적 관계를 연구한 흥미 있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도시인 스위스 쮜리히 대학의 은퇴 교수인 캄피 박사(prof. dr. Emidio Campi)가 칼빈과 불링거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포함한 두 왕국 사상과, 이 두 신학자들의 이슬람에 대한 태도를 발제한 것이다.

캄피 박사에 의하면 제네바의 칼빈과 쮜리히의 불링거는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은 전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지상의 도시로부터 영적인 도시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서로 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문제에 위정자가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서 불링거가 칼빈보다는 보다 긍정적이었고, 칼빈은 보다 조심스러워서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더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슬람과 터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오토만의 위협이 증대하는 상황 속에서, 칼빈과 불링거 모두 보수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불링거는 이슬람에 대해서 종교적인 죄를 포함한 도덕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슬람의 도덕적인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불링거와는 달리,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신학적인 문제들을 적절하게 다루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인 교리들을 가지고 이슬람을 논박했던 것이다.

캄피 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서, 칼빈과 불링거와 같이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을 형성했던 두 개의 중요한 인물을 이해할 때, 라인강 이북의 종교개혁 연구와 칼빈의 신학 연구를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고립시키는 사고를 버리고, 상호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필자는 이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는 성경에 근거한 명확한 신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칼빈과 불링거와 같이 일치성 속에서도 그들의 강조점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2. 제네바에서 꽃피운 개혁 신학과 교회의 만남

우리의 초점을 좀 더 좁혀서, 칼빈이 이끌던 제네바의 개혁주의 교회를 주목하자. 이에 대해서 화란 자유대학의 이어릭 더 부어 교수(prof. dr. Erik A. de Boer)는 주제 발제를 통해 매우 의미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더 부어 교수는 제네바의 ‘목사회’(Company of Pastors)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끝에 칼빈이 주도하던 제네바에서 개혁신학은 교회 현장을 통해서 꽃을 만발하게 피웠다고 발표했다.

신학(Theologia)을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 신학 등으로 분류한 것은 16세기 초 안드레아스 히페리우스(Andreas Hyperius, 1511~64)에 의해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제네바에서는 신학이 실천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더 부어 교수의 제네바의 ‘목사 모임’(congregation) 연구를 보면, 매 주 금요일 아침마다 제네바와 인근 마을의 모든 목사들이 한 곳에 모여서 성경 중 일정 부분을 택해서 서로 주석하고 토론을 했던 것이 ‘목사 모임’이었다. 그 목적은 제네바 교회 교리의 순전함과 일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공부가 끝난 후 정오부터 목사들은 목회적 모임들을 가진다. 1545년 이후에는 목사들이 매주 금요일 오후에 성경으로부터 한 결론을 제시하면 다른 동료들은 다툼 없이 부드러운 톤으로 서로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토론’(disputation)이었다. 더 부어 교수에 의하면 이것을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목사 모임’(congregation)에서 하는 일은 성경신학적인 것이고, ‘토론’(disputation)은 조직신학적인 것이었다.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수립한 이후, 라틴어 등 신학을 위한 인문학적 기초 도구들을 가르치는 스콜라 프리바타(scholar privata)라고 하는 하급 단계 교육이 제공되었고, 이어서 고급 단계인 스콜라 프블리카(scholar publica)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목사 후보생들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제네바는 ‘목사회’(Company of Pastors)에 의해서 신학이 실천되고 있었다. 신, 구약에 대한 강의들은 대중에게 열려있었다. 신학에 관심 있는 평신도들도 와서 배우고 질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목사 모임’(congregation)은 일종의 ‘열린 대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토론’(disputation)은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직 성직자들만 참석할 있었다.

결론적으로 칼빈 당시 제네바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전 언어와 성경 언어에 대한 집중성이다. 성경 원어로부터의 소리를 듣는 것은 곧 진정한 학자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성경 해석을 신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어떤 본문이 택해지든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성경은 전체의 연합성 속에서 이해되었다. 또한 당시의 제네바에서는 말씀이 해석이 된 후에 그 말씀을 통해 교리가 형성되었다. 이 교리는 삶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위해서 특화될 수 있었다. 즉 기독교인의 삶, 윤리, 교회 정치(행정),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 당시의 제네바는 개혁 신학이 교회와 만나 꽃을 만개한 곳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3. 칼빈의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는 칼빈의 신학

마지막으로 필자는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그의 신학적 특징에 대해서 발표했다. 칼빈은 그의 생애 맨 마지막까지도 설교 사역을 고집했을 정도로 설교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했다. 왜냐하면 설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며, 동시에 교회를 완전하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는 ‘말씀’과 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칼빈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죽으심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작정하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되게 하신다고 선포했다. 이때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강조했다. 성령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런 수직적인 화해에 근거하여 칼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설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화해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때 칼빈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의 설교에서 두드러진 점은 이것이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릴 봉헌물’을 거두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과 화해된 성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물심 양면으로 섬김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 3판(1543년) 그리고 최종판(1559년)에서 각각 목사의 직분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제3판 이후 급격히 목사직의 이해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칼빈은 그의 주석과는 달리 설교에서 성령의 사역을 현격하게 강조함으로 설교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임을 잘 보여주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제10회 세계 칼빈 학회의 주제 논문들을 통해서 크게 세가지를 고찰해 보았다. 첫째는 칼빈과 불링거를 통해서 개혁 신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다. 둘째는 칼빈의 개혁신학이 제네바라는 현장에서 어떻게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그 선명한 청사진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평생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삼았던 설교를 통해서 그의 신학의 정수를 들여다 보았다.

칼빈, 그는 과거의 한 영웅이 아니다. 우리는 칼빈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은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교회 현장을 통해서 여전히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

칼빈. 그는 1564년 5월에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칼빈은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학과 교회를 향한 불타는 열정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다음은 임종 1개월 전에 노쇠한 목회자 칼빈이 남긴 유언이다. 그는 분명 한 명의 신실한 성도요 목회자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가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그분께서 제게 자비를 베푸시고 제가 갇혀 있던 우상숭배의 심연으로부터 건져내시어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시고 구원의 교리에 참여하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분에 넘치도록 베푸셨고 수백 번 거절되어야 마땅할 저의 모든 약함과 실패들을 참아주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제게 보이셨는데, 심지어 그분 자신의 복음 진리를 전파하시고 선포하시기 위해 저와 저의 사역을 사용하시는 점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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