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개혁자들의 땅 ‘삐까흐디(La Picardie)’

변화와 저항의 땅, 종교개혁 꽃피다

칼빈의 출생지 … 불의 맞선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 물려받아
국경지대 특성상 투쟁운동 많아 … 프랑스 종교개혁 산실로

▲ 권현익 목사(GMS 프랑스 선교사)
칼빈 출생 500주년 후 최근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유적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그곳을 소개하는 역사 안내판들이 세워진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들도 종교개혁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에 한층 쉽게 다다갈 수 있게 됐다. 다소 아쉬운 점은 표지판들이 모두 프랑스어로 기재되어 있으며 다음 안내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이에 본지는 프랑스 주재 권현익 선교사의 기고를 통해 새롭게 정비된 칼빈과 위그노들의 역사적 현장들의 의미와 현황을 총 4회에 걸쳐 다시금 조명한다.(원고 중 칼빈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칼빈’으로 통일하고 다른 이름들은 프랑스식으로 기재한다) <편집자 주>

▲ 칼빈이 태어나기 3년 전 1506년에 완공된 성당 참사원의 도서관 건물 -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제하흐가 이곳에서 참사원으로 일하였다.

개신교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개신교는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던 위그노들의 삶이 있었기에 꽃 피울 수 있었다. ‘위그노’라는 명칭은 1560년경 이후부터 사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프랑스내의 개신교인들을 무시하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 교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프랑스 종교 개혁의 정상에는 존 칼빈(Jean Calvin, 1509년~1564년)이라는 거목이 우뚝 솟아 있다. 하지만 우연히 뚝 떨어진 씨앗 하나가 거목이 되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숲을 이룬 것은 아니다. 칼빈은 그의 부모에게서 발견되는 유전적인 기질과 그가 태어난 삐까흐디라는 지역에서 유난히 많이 배출되었던 개혁자들의 영향을 받아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존 칼빈으로 알려진 원래 그의 이름은 장 꼬뱅(Jean Cauvin)이며, 꼬뱅은 chauve(대머리)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1. 변화를 시도하는 가족들

▲ 조부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1차 세계 대전 때 건물은 파괴되었다. ‘칼빈의 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멀지 않은 부두 근처에 아버지 Gerard Cauvin의 길도 있다.
칼빈의 아버지 제하흐 꼬뱅(Gérard Cauvin)은 느와용(Noyon) 근처 작은 마을인 뽕 레베크(Pont l’Evêque)에서 배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 전수를 포기하고 개인 사업에 해당되는 통 제조업자가 된다. 현실 상황에 답습, 체념 또는 안주하지 않으려는 이런 태도는 그의 세 아들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지며, 위의 두 아들 히샤(Richard)와 쟈크(Jacques)는 당시 수도인 파리로 이주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파리로 이주하여 왕궁 근처에서 대장간을 차린다. 칼빈이 훗날 파리로 유학을 가서 개혁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삼촌들이 파리에서 살고 있었기에 용이했다.

두 형들 보다 더욱 삶의 변화와 신분 상승에 대한 강한 야망을 갖고 있었던 제하흐는 1481년경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느와용으로 향한다. 그의 학업과 법에 대한 열의는 칼빈으로 하여금 학자가 되게 하는 유전적 기질로 물려진다. 그가 정착하게 되는 느와용은 주변 도시들보다 인구가 적었지만 갈로-로마시대 때부터 수도였던 스와송(Soissons)에서 가까운 위성도시여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주변 도시들보다 기독교가 늦게 전래되었지만 아주 깊게 토착화 되었다. 이런 이유로 느와용은 북부 프랑스에서 정치 종교적으로 아주 주요한 도시가 된다.

학업을 마친 제하흐는 마침내 공인 회계사 자격증을 획득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던 가톨릭 지도자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을 뿐 아니라, 평민으로서는 최고의 권력인 부르조아(시민권)를 1497년에 취득하며, 당시로서는 드문 다섯 개 정도의 직책을 갖게 된다(성당 공인 회계사, 주교 비서직, 참사원의 홍보 담당, 교회 서기, 백작령의 세무 대리인). 그는 두 마리의 말과 한 명의 사환을 고용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현 느와용 성당 뒤편에 위치한 도서관 건물에서 참사원의 직책을 감당하게 된다. 야망을 이룬 그는 성직자들을 조언할 뿐 아니라 주민과 사제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주교 앙제스(Hangest)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칼빈이 앙제스의 조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개혁의 길을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회적 성공뿐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깡브레(Cambrai)의 호텔 경영자의 딸로 돈독한 신앙과 부를 겸비한 당대 최고의 미인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과 결혼하므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 제하흐가 참사원들과의 충돌하였던 느와용 성당 감옥. 훗날 칼빈이 개혁 노선에 섰을 때, 궐석 재판으로 출교 정죄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2. 불의에 저항하는 아버지 제하흐의 성격은 칼빈에게 그대로 이어지다

가톨릭의 중심부에서 일하던 제하흐이었지만, 부당한 판결로 사람들이 감금되는 일들이 발생할 때는 참사원과 대립 관계도 불사할 정도로 불의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526년 느와용 전속 신부인 니꼴라 오브리(Nicolas Obry)의 유언 집행자로 임명되었지만 부당한 유언 집행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그 결과 직무 유기로 인한 공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쓰고 출교를 당하게 된다.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자세는 아들 칼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례로, 칼빈이 엉굴렘으로 피신했을 때 신변 안전 뿐 아니라 기독교강요 초고를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스트라스부르 피난길에도 함께 하며 경제적 도움을 준 몽테규의 동창 루이 듀 띠에(Louis du Tillet)와의 관계이다. 그가 개혁자의 길에서 집안의 압력에 의해 가톨릭 사제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루이가 제공하는 친구로서의 경제적 도움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또한 칼빈을 쥬네브로 초대할 뿐 아니라 사역 초기 동역자인 기욤 파렐이 깔뱅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깨뜨리고 68세의 나이로 18세의 젊은 과부와 결혼하자 그와의 따뜻한 우정 관계도 단절시킬 정도로 강직하였다.

3. 삐까흐디 지역의 대표적인 개혁자들

프랑스는 21개 지역과 95개의 도(道)로 이뤄져있는데, 칼빈이 태어난 삐까흐디 (La Picardie) 지역은 당시 국경 지역으로 이웃나라와 잦은 분쟁이 있었고, 전쟁과 착취에 시달린 농민들의 반란을 비롯한 투쟁 운동이 많았던 곳이다. 또한 국경 지역이었기에 외국의 선진 사상들을 빨리 접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와 저항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삐까흐디 지역은 종교개혁에서도 선두주자가 되어 ‘종교 개혁 거장들의 땅, 프랑스 종교 개혁 산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 종교 개혁과 관련된 장소를 소개하는 역사 안내판.
쟈크 르페브르  (Jacques Lefevre d’Etaples, 1450-1527)

북부 프랑스의 최고 휴양지인 르 뚜께(Le Touquet) 근처 에따쁠(Etaples)에서 태어나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학업을 마친 후 1492년에 파리에서 사제와 교수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의 에라스무스’라고 불리며 프랑스 교회 개혁의 불을 지피는 선구자였다. 또한 루터의 저술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1512년 루터의 로마서 주석에서 르페브르를 16번이나 언급하면서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은 복음으로 돌아갈 때만 오직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그는 “복음을 알라. 복음에 순종하라 그리고 복음을 알게 하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마태복음 16: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말씀은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교황제도를 주창하는 가톨릭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1523년에 그가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면서 사람들은 번역된 새로운 성경을 듣고 배우기 위해 그 주변에 모여 들었다. 이 모임은 가톨릭 내의 개혁 운동인 동시에 개신교 출발의 시발점이 되는 최초 비밀 집회였다. 1526년에 구약 성경까지 출판하게 되면서 그의 번역 성경은 프랑스 개혁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으며, 당대 모든 개혁자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전통적 신앙을 비판 없이 수용하던 것과 달리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졌고, 제하흐 후셀(Gérard Roussel)과 기욤 파렐(Guillaume Farel)도 그의 수하에 있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프랑스 남부 도시 네락(Nérac)에서 칼빈의 방문을 받고 칼빈에게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을 받았다. 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하흐 후셀 (Gerard Roussel 1500-1550)

느와용에서 70킬로 정도 떨어진 바끄리(Vaquerie) 출신으로 프랑스 개신교의 산지와 같은 모(Meaux) 그룹의 중심 역할을 했다. 파리에서 칼빈과 비밀 집회를 통해 성경을 가르치며 깔뱅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수와 1세의 누이이며 나바르 왕국의 여왕인 마흐규리뜨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의 궁중 설교가로 활동하였고 말년인 1536년에는 나바르 왕국의 오로홍(Oloron) 지역 주교로 있으면서 피신중인 칼빈을 만나 격려하였다.

루이 베흐꺙 (Louis de Berquin 1490-1529)

깔레(Calais) 근처 베흐꺙(Berquin) 출신의 루이 베흐꺙은 좋은 성품을 가진 종교인으로 영주이며, 프랑수와 1세의 정치 고문관으로 일하였다. 프랑스 가톨릭의 학술적 산지인 소르본느(la Sorbonne) 대학을 대표하는 노엘 베다(Noël BÉDA)와 종교적 논쟁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파리 의회는 1523년 5월 13일에 그의 책들을 압류하며 그의 의견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지만 수용하지 않자 화형을 선고한다. 일단 프랑수와 1세가 그를 석방시키지만 계속 소르본 신학자들의 저서에 대하여 성경을 근거로 비판하게 되자 결국 파리 그헤브 광장 (현 파리 시청)에서 1529년 4월 22일 산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삐에흐 드 라 하메 (Pierre de La Ramee)

인문주의 철학자로서 ‘하무스’라고도 불리는 삐에흐는 깔뱅 생가 박물관에 석상으로 보관될 정도로 칼빈의 가르침과 개혁 정신을 가르쳤던 사람이다. 느와용에서 멀지 않은 큐뜨(Cuts)에서 1515년에 출생하였고, 1551년에는 왕의 철학과 웅변술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어학과 역사, 철학, 지학을 비롯한 많은 분야의 당대 최고 학자가 된다. 종교 개혁 뿐 아니라 대학에서의 교수 방법의 개혁 및 많은 가난한 학생들도 공부할 수 있도록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한다. 삐에흐는 1572년 8월 파리에서 일어난 바돌로메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이틀 후 자객에 의해 살해되어 그의 몸은 파리 시내에 끌려 다니다가 세느강에 버려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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