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싸움을 많이 하고 자란다. 싸움을 하고 나면 대부분 더 친해지는 경향이 많았다. 그것은 서로가 마음을 풀고 이해의 폭을 넓혔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것은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화해를 하고 좋은 관계가 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은 본디 대립보다는 평화를 원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서는 상대방보다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소설이나 영화 또는 실제 인간의 삶은 사랑과 질투, 대립과 갈등의 구조를 이룬다. 이 같은 양면적 대립 구도는 보복과 용서의 반복적 구도로 짜여진다. 그것을 우리는 반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용서는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 항상 존재하며 사태를 반전시키는 키워드가 된다.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용서의 의미를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덮는다(코팔-시편 78편 38절), 들어서 없앤다(나사-시편 25편 18절), 보낸다(샬라크-레위기 16장 10절),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탕감하다(카리조마이-누가복음 7장 43절) 등 단어의 의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의 용서가 있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백지화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징계하고 용서했다.
예수님이 가르쳐 준 사랑의 본질은 용서다. 베드로에게 가르쳐 준 용서의 한계는 단순한 수치일 뿐 그는 끝없이 용서했고 마지막까지도 용서를 구했다. 그 용서를 배우고 닮기 위해 신앙의 정진이 필요하다. 사람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거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될 대로 되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다. 신앙의 힘은 그런 막다른 길을 만나지 않게 하려니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도록 인도한다.

목회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용서는 연습에서 나온다. 지독한 배신과 화를 당했어도 긍정의 시각과 너그러운 마음을 품는다면 시간이라는 보약은 용서의 실마리를 열어주고 당신의 인생을 살찌게 할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다. 사랑과 화합을 강조하지만 날로 각박해 가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받아드리고 먼저 실천해야 할 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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