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강제납북 잇따라…반공사상 무장 계기 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교회는 전쟁 사흘만인 6월 27일 예수교서회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대한기독교구제회>(회장:한경직 목사)를 결성했다. 이후 1950년 7월 3일 피난지 대전에서 한경직 황금찬 김창근 목사 등이 주축이 되어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했다. 구국회는 주로 선무, 구호, 방송 등의 활동을 했으며 지원병을 모집해 전선으로 내보내는 일도 담당했다.

1951년 1월 4일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됐고 이때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했다. 또 서울 등지에 남아있던 교계 지도자들도 모두 남하해 부산 대구 등지로 이동했다. 교계 지도자들은 1951년 1월 9일 부산중앙교회에서 <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회는 미국 대통령, 유엔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전달했다. 이외에도 한국교회는 각종 대중 집회를 통해 전쟁활동을 지원했다. 대개는 북진통일, 휴전반대 등 남한정부의 입장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한국전쟁은 남측에서만 100만 명의 인명피해를 냈고 한반도 기간시설의 80%를 파괴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는 한국교회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으로 교회의 1/3이 파손되었으며 저명한 교계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강제납북으로 행방불명이 됐다.

 <표>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상황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완전 손실된 수

152

84

27

4

 파괴된 수

467

155

79

4

 합계

619

239

106

8

자료출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연감>(1957), 37.

전쟁으로 소실, 파손된 교회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만 해도 장로교 619개 교회, 감리교 239개 교회, 성결교 106개 교회, 구세군 8개 교회였다. <표 참조> 이들 교파 외에 기타 교파도 피해가 막심했다. 이러한 피해는 단지 교회 건물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각종 미션스쿨 및 기독교기관들도 파괴 또는 손상을 입었다. 기독교서회, YMCA, 이화여자대학교 등은 대표적인 건물들이었다.

전쟁으로 파손된 한국교회 건물들에 대한 재건운동은 1952년 1월 14일 <재건연구위원회> 결성으로 시작됐으며 세계교회의 원조가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세계교회는 재정적으로 뿐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목사 등 수많은 부흥사들을 파견해 한국교회의 신앙의식을 다잡아주었고, 이단들에게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여를 했다.

전쟁은 한국교회의 구조에도 많은 변화를 줬다. 이북 신도들이 남하하면서 교회의 지역적 구도가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방에서 서울 경기 지방으로 바뀌었다. 원체 반공의식이 있었던 한국교회가 더욱 투철한 반공사상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됐다. ‘망명노회’ 또는 ‘무지역노회’ 제도가 비롯된 것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월남성도들의 남하 때문이다. 이단 사이비 종파가 다수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까지 5년간 등장한 이단종파만 해도 20여개가 넘었다.

전쟁으로 인해 사실 한국교회도 많이 성장했다. 장로교의 경우 1949년에 교회는 649개, 교인 수는 38만5215명이었다. 그런데 1959년에는 교회 3527개, 교인수 89만2083명으로 늘었다. 교회는 5배, 교인 수는 2.3배 증가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또한 한국군종제도를 태동시켰으며 외국민간원조단체들이 자리 잡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 교계 방송과 선교단체들도 1950년대에 다수 생겨났다.

 <도움말씀 주신 분=허명섭 교수(서울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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