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은혜를 볼 수 있게 하는 징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 강화시키고자 성례 제정하셔


[제28강좌] 성례: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기독교강요 4.14.1-26; 4.15.1-4.16.32)


1. 성례의 비밀

성례는 복음 선포와 함께 우리의 믿음을 돕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바와 같이 성례는 ‘거룩한 것에 대한 보이는 표’(rei sacrae visibile signum) 혹은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형상’(invisibilis gratiae visibilis forma)으로서 다음과 같은 이중적 의의가 있다. 첫째로, 성례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인자하심에 대한 약속을 가시적으로 인치신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지켜주신다. 둘째로, 성례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경건을 확증한다. 곧 성례는 ‘외형적인 표상으로써’(externo symbolo)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과 그것을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을 제시하는 ‘증언’(testimonium)과 ‘증거’(testificatio)가 된다(4.14.1).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성례를 제정하셨다. 성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온전히 수납하도록 돕는데 있다. 성도는 비록 거듭났지만 ‘무지’, ‘어리석음’,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adiumentum)이 여전히 필요하다. 성례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어주신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괴어지고 받쳐지게’(fulciatur ac sustentetur) 하신다. 성례의 ‘표징’(signum)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선물의 ‘의미’(significatio)를 우리의 심령에 ‘확증하고 인치고자’(confirmet ac obsignet) 하신다. 그러므로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praeeuns promissio)에 따르는 ‘부록’(appendix)과 같다. 신학자들은 ‘비밀’(musthrion)이라는 성경 말씀을(엡 1:9; 3:2-3; 골 1:26-27; 딤전 3:16) 번역함에 있어서 그 신비를 표현하기 위하여 ‘sacramentu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성례를 이 단어로 표현함은 그 비밀이 그리스도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표징과 함께 주어진 약속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4.14.1-3).

성례는 ‘외형적인 표징’(externum signum)과 ‘말씀’(verbum)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말씀은 주문과는 달리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가 ‘축성경’(祝聖經, consecrationis formula)을 읽기만 하면 그것이 회중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유효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 성례에 있어서 ‘말씀의 능력’(virtus verbi)이 작용하는 것은, ‘그것이 말씀되기 때문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이다’(non quia dicitur, sed quia creditur). 표징에 대한 성례 제정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만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대로의 은혜를 받는다. ‘말씀의 가르침’(doctrina)이 없는 표징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양자는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성례가 ‘보이는 말씀’(visibile verbum)이라고 불리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성례는 ‘믿음의 말씀’으로(롬 10:8) 거듭난 성도가 그 가운데 약속된 언약의 복을 누리는 한 방편이다. 성례로 말미암아 믿음이 처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성례가 ‘믿음의 기둥’(fidei columna)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이미 역사하는 믿음을 아래로부터 괴서 받치기 때문이다. 성례는 이미 받은 ‘영적인 선물들을 비추는 거울’(speculum)과 같은 것이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언약의 백성의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할례를 ‘인’(印, sfragida, sigilla)이라고 불렀듯이(롬 4:11),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께서 삶과 죽음을 통하여서 다 이루신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성도의 은혜를, 그 ‘고상한 신비’(sublima mysteria)를 가시적 표상으로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의 표징은 단지 외계적인 상징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신비로운 물체도 아니다.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른 ‘경건한 마음 씀으로’(pia consideratione) 성례의 신비를 경험할 일이다(4.14.3-6).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보증’(pignus)으로서, 성도의 믿음을 ‘지탱시키고, 양육시키고, 확증시키고, 증진시킨다’(sustinent, alunt, confirmant, adaugent). 성례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적시한다.

첫째,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훈하신다. 둘째, 성례로써 그 말씀을 확정하신다. 셋째, 자신의 영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 가슴의 문을 말씀과 성례에 열도록 하신다(4.14.7-8).
성례가 그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인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례로써 믿음이 더해지고 강화되는 것은 그 자체에 ‘은밀한 힘’(arcana vis)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virtus)이 없다면 가시적 표징은 그저 한 물체에 불과할 뿐 아무 성례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믿음을 낳고,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견고하게 하는’(ad fidem et concipiendam, et sustinendam, et fovendam, et stabiliendam) 작용을 하게 되면 성례는 제정된 바대로 고유한 기능을 다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작용’(spiritus actio)이 없다면 성례은 ‘힘’(vis)도, ‘효력’(energia)도 없게 될 것이다.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말씀과 성례가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으로 옮겨진다. 성령은 ‘마치 매개하는 빛과 같이’(quasi intermedio fulgore) 역사한다. 이 빛으로써 심겨진 말씀의 씨가 자라게 된다(마 13:3-23; 눅 8:5-15; 고전 3:7).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례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성례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받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 성례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리적 공로를 믿는 사람에게만 하늘 보화가 부어진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interior gratia)와 성례의 ‘외적인 거행’(externum ministerium)은 구별되어야 한다(4.14.9-12, 17).

성례를 표현하는 ‘sacramentum’은 어원상 군인의 충성 맹세를 뜻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신비’(mysterium)를(고후 6:16; 겔 37:27) 함의하면서 두 가지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성례는 언약 백성의 믿음을 돕는다. 그것은 성도가 은혜의 비밀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나타낼 뿐 아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은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예식이어야 한다. 성례 가운데 성도는 감사와 찬미로써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다. 둘째, 성례로써 성도는 다른 지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다. 교리의 순수성과 성도간의 사랑이라는 교회의 두 요소가 성례 가운데 확증된다. 성례는 ‘의의 원인’(causa iustitiae)이 될 수 없다. 성례로써 구원의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성례로부터 ‘구원의 확신’(salutis fiducia)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이는 표징이 없이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다. 역으로, 참 성화가 없는 보이는 표징이 있을 수 있다”(4.14.13-14).

성례의 ‘표징’(signum)은 ‘형상’(figura)과 ‘진리’(veritas)를 포함하고 있다. ‘형상’은 표징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물질적 속성이며 ‘진리’는 그 형상이 뜻하는 의미이다. ‘형상’이 아니라 ‘진리’가 성례의 ‘본체’(res)이다. 무엇이 표징이 제시하는 성례의 진리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그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리의 표가 성례일진대, 세례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라면 성찬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계속의 표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질료’(materia)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례의 ‘실체’(substantia)가 되신다. 표징 자체가 아니라, 표징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리적 속죄 사역을 믿는 믿음을 확증시키고, 강화시키는 성령의 감화가 곧 성례의 유익함이다. 이렇듯 성례의 의의는 표징 자체의 ‘은밀한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징을 통한 믿음의 역사에 있다. 따라서 받는 사람의 믿음이 중요하다(4.14.15-16). 구약 시대에 계시된 많은 은혜의 표들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신약의 성례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의 믿음을 강화하시기 위해서 말씀과 함께 보이는 보증을 더하셨다(창 2:9; 3:22; 9:13-16; 15:17; 삿 6:37-40; 왕하 20:9-11; 사 38:8). 이러한 구약의 표징들도 언약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제정되었다. 다만 그들은 그 분께서 그들 가운데 지금 계시지만 앞으로 오셔서 구원을 다 이루실 것을 바라며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분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자신의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해 주신 신약 성도들과는 구별되었다(4.14.18-20).


2. 세례: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삶의 표

‘세례’(baptismus)는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몸 된 교회의 ‘연합체’(societas)에 ‘입교하는 표징’(signum initiationis)이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것을 고백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례를 통하여서 성도는 다른 지체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들과 한 종교를 믿는 가운데 한 예배를 드림을 입증하고,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확증한다(4.15.1, 13).

세례의 유익은 다음 세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로, 세례는 우리가 정결함을 받았다는 ‘표상’(symbolum)과 ‘증거’(documentum)가 된다. 세례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도임을 드러내는 ‘표’(tessera)나 ‘표지’(nota)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속과 함께 자신의 뜻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마 28:19; 행 2:38; 막 16:16).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엡 5:26; 딛 3:5) 성도를 ‘구원하는 표’가 세례이다(벧전 3:21). 우리의 죄를 씻는 물두멍이 그리스도의 피이므로, 세례는 그 실체로서 그리스도를 인친다. 칭의의 법정적 선포가 항상 유효하듯이 세례의 효력은 이후의 죄로 말미암아 무효가 되지 않는다. 전체 구원의 은혜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로 말미암듯이,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오직 그 분 안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열쇠의 권한을 왜곡하여 세례 이후의 사죄권은 사제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허망될 뿐이다(4.15.1-4).

둘째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죽음’(mortificatio)과 ‘삶’(vivificatio)을 제시한다. 세례로써 성도는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교훈을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죽음에 연합하며(롬 6:5) 살리는 영이신 그 분의 부활에 동참하는(롬 6:8) 은혜를 확증한다. 세례의 표는 단지 다시 살아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즉 죄를 버리고 의로써 거듭난 중생의 삶을 사는 표가 세례이다(롬 6:11; 골 2:11-12; 딛 3: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새 삶 가운데 작용함을 인치는 거룩한 예식이다(4.15.5).

셋째로,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가 되어서’(unitos) 그 분께서 선물로 주신 ‘모든 선한 것들에 동참하는 자들’(omnium bonorum participes)이 되는 은혜를 인친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언약적 전가를 받으심과 함께 우리를 자신의 자리에 함께 세우기 위함이셨다(마 3:1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은 그 분을 옷 입음이며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보증하는 것이다(갈 3:26-27). 구원받은 성도로서 이제는 육체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본성으로’(nova spirituali natura) 사는 자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살게 된다. 회개의 세례는(마 3:6, 11; 막 1:4; 눅 3:16; 요 3:23; 4:1; 행 2:38, 41) 거듭난 중생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세례는 이후의 죄로 인하여 변개되지 아니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례 가운데 함께 역사하신다. 세례의 ‘원인’(cuasa)은 성부께 있다. 세례의 ‘질료’(materia)는 성자시다. 세례의 ‘효력’(effectus)은 성령의 역사이다(4.15.6).

세례의 이러한 유익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전가해 주시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는다. 세례 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한 것은(마 3:11; 눅 3:16) 성령을 주시는 분 곧 ‘내면적인 은혜를 조성하시는 분’(interioris gratiae autor)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세례가 확증하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거듭난 성도는 ‘죄책과 저주로부터는’(reatu et damnatione) 해방되었으나(롬 8:1) 여전한 곤고함이 남아 있다(롬 7:18-24). 세례의 표징은 새 사람으로서 다시 산 사람이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은혜의 삶을 사는데 까지 미친다(4.15.7-12). 세례의 효력은 물이라는 표징 자체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 세례의 ‘본체’(res)와 ‘진리’(veritas)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우리가 한 몸이 되었듯이, 세례로 우리는 그 분과의 연합의 시작을 제시한다. 세례의 효력이 표징 자체에 있지 않듯이, 그것을 거행하는 목사의 능력과 가치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4.15.14-16; 4.16.25).


3. 유아세례: 하나님의 언약의 시간표

구약 시대 할례는 인류의 부패한 본성을 잘라 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표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가 됨을 인치는 예식이었다. 할례의 ‘인’(sigillum)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피를 그 ‘실체’(substantia)로서 믿는 자신들의 믿음을 확증하였다(갈 3:16; 롬 4:11; 요일 1:7; 계 1:5). 구약 시대 백성들은 할례를 통하여서 세례의 영적 약속을 미리 누렸다. 세례가 그러하듯이, 할례도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믿는 언약 백성들이 누리는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였다. 할례와 세례는 무조건적 은혜와 영생의 ‘약속’(promissio)을 공유한다. 성례가 작용하는 ‘내적 신비’(interior mysterium), 즉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히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히 4:14; 5:5; 9:11) 표피를 베고 물로 씻는 표상에 의해서 ‘의미되는 본체’(res signata)가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표징의 양식과 구속사적 경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할례와 세례는 그 ‘실체’(substantia)나, ‘진리’(veritas)에 있어서 동일하다. 할례의 예표가 세례로 성취되었다. 할례는 이후 오셔서 다 이루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세례는 이미 오셔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거행되었다(4.14.22, 23-24; 4.16.1-4).

할례와 세례가 동일한 언약의 약속을 확증하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언약의 약속을 인치기 위해서’(ad obsignandam foederis promissionem) 할례를 행했듯이(창 17:9-14), 이제는 믿음의 자녀가 세례를 받음이 합당하다. 유대인의 자손이 그러하였듯이(스 9:2; 사 6:13), 성도의 자녀들은 ‘언약의 상속자들’(foederis haeredes)로서 거룩하게 구별된다(고전 7:14). 할례와 세례 모두 언약의 자녀가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이 되는 표이지만, 그 경륜에 있어서 세례가 더욱 귀하다. 그림자가 몸으로서 성취되었으므로, 세례가 할례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를 통해서 세대를 이어서 복을 주시겠다는 은혜의 언약을(출 20:6)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그 의를 전가해 주신다는 ‘놀라운 위로’(eximia consolatio)가 넘친다. 유아세례는 사도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이 또한 그 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인치는데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아세례를 거행하여 교회는 연합체로서 사랑을 더하고, 부모는 자녀를 언약의 백성으로 양육하며, 유아 본인은 더욱 믿음의 확신 가운데 자라게 되는 유익을 얻음이 마땅하다. 주님께서는 천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맞으시고 안수해 주셨다(마 19:13-15). 이로써 어린 영아와 유아를 천국의 백성으로서 인침이 합당함을 계시하셨다(4.16.5-9).

할례가 인친 구약 언약의 약속도 영적이었으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 표상은 육체를 베는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남이었다. 이렇듯 할례의 실체가 세례와 다르지 않으므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다(골 2:11). 그리고 그 의미로서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을 제시했다(골 2:1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녀가 ‘언약의 자손’으로서(행 3:25)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된다(창 12:2; 17:7; 갈 4:28; 롬 4:12).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은 옛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롬 15:8). 구약시대 유아들에게 거행된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는 구별된다는 표였다. 당시 그 분께서는 아직 ‘그림자’로 현존하셨다. 이제 세례는 ‘몸’으로 오신 그 분 ‘안에’ 있는 언약의 백성을 인치는 표가 되었다(엡 2:11-13; 골 2:17). 이렇듯 세례가 할례의 완성이니, 어찌 유아세례를 금하여 언약의 복을 감할 수 있겠는가(4.16.10-16)?

인류는 모태에서부터 죄 중에 잉태되어(시 51:5)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사망에 속하여 태어난다(엡 2:3; 고전 15:22).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분별력이 없는 유아라도 자신의 뜻에 따라서 거룩하게 하실 수 있다. 할례가 그렇듯이(렘 4:4; 9:25; 신 10:16; 30:6) 세례는 회개의 표이다. 회개의 마음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생긴다. 유아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한 ‘씨’(semen)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확증하는 현재적 효과가 있다. 그 나머지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중생 시간표’(suos regenerandi gradus)에 따라서 자라감에 따라서 때에 맞추어 부여하신다. 세례의 능력이 수세자의 공로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세례는 공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며,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그 분 자신의 섭리에 따라서 인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의 은총을 베푸셔서 유아들을 ‘가족’(familiares)과 ‘권속’(domesticos)으로서 자신의 집에 들이신다. 곧 자신의 집인 교회의 ‘지체’(membra)로서 가입시키신다. 이를 인침이 세례니, 유아의 세례가 복되지 아니한가(4.16.17-21, 26,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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