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공의·자비가 역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백성만이 ‘공로 없는 은혜’ 누려


[제23강좌] 예정: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따른 영원한 작정(기독교강요 3.21.1-3.24.17)


1.‘영원한 선택’(aeterna electio)의 은혜

‘생명의 언약’(foedus vitae)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인함을 믿는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pia mens)으로 인류의 창조와 더불어 예정의 섭리 또한 찬미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定)하심’(Dei nutus)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구원’(ad salutem)으로 예정하셨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ad interitum)으로 예정하셨다. 오직 택함 받은 사람만이 예정 교리의 ‘유용성’(utilitas)을 깨닫고 ‘가장 달콤한 열매’(suavissimus fructus)를 맛본다.

예정 교리에는 세 가지 유용성이 있다. 첫째, 예정의 교리를 알기 전에는 영원한 선택이 하나님께서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샘’(ex fonte gatuitae misericordiae)에서 나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둘째, 이 가르침으로 인하여 ‘값 없는 선택’(ad electionem gratuitam)에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선택의 은혜는 행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선택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빚을 지셨기 때문에 치르시는 ‘값’(merces)이 아니다. 셋째, 예정의 교리를 맛본 사람만이 ‘진정한 겸손’(vera humilitas)에 이르게 된다. 영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그 분의 손으로부터 앗아갈 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그 분 아버지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요 10:28-29).

예정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깊이 감추어 두신 ‘가장 고상한 지혜’(sapientia sublimita)이다. 이 지혜의 ‘영원성’(aeternitas)을 그 자체로 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단지 미로(迷路)로 이끌릴 뿐이다. ‘하나님 자신의 은밀한 뜻’(voluntas sua arcana)은 오직 그 분 자신의 말씀으로만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이로운 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해야 할 것이다(3.21.1).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경박하고, 위험한 ‘호기심’(curiositas)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막고 우리를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만들 뿐이다(욥 12:24). 어거스틴은 예정의 진리는 우리가 ‘왕의 침실로’ 나아가게 되는 지식과 지혜의 보화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aliqua docta ignorantia)을 견지해야 한다(3.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의 교리를 암초와 같이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로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et necessarium et utile). 주님께서는 성경 가운데서 친히 입을 여신다. 우리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를 함께 열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화라고 함은(잠 25:2) 오묘한 일이 그 분께 속하였다 함이요 그것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우리는 예정의 진리에 대해서 ‘야수적인 무지’(bruta inscitia)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3.21.3). 예정은 성경이 가르치는 주요한 믿음의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비밀로 감추신 영역은 그대로 두고 받되 알려주신 것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3.21.4).


2. 선택(electio)과 유기(reprobatio)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aeternum Dei decretum)을 칭한다. 이로써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vita aeterna)이,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damnatio aeterna)가 정하여 진다. 각 사람은 이 중에 한 길에 서므로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ad vitam),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ad mortem) 이르도록 ‘미리 정하여졌다’(praedestinatum). 이러한 선택은 개인적이나, 간혹 그 섭리는 ‘여호와의 분깃’으로 택하신 ‘백성’ 단위로도 선포된다(신 32:8-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후손을 ‘오직 거저 베푸시는 사랑으로’(tantum gratuito amore)말미암아 택하셨다(신 4:37; 7:6-8; 10:4-5; 23:5; 시 47:4). 선택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선물’(dos)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사람의 가치’(dignitas)나 행위의 공로들로부터 찾는 것은 무모하다. 이러한 은혜는 ‘그저 베푸시는 언약의 원리’(ad principium gratuiti foederis)로부터만 흘러나온다.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선택의 ‘이유’(causa)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Dei beneplacitum) 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야곱의 후손을 자신의 기업으로 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복이 있다(시 33:2; 105:6, 42).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오직 주께서 긍휼히 여기사 택한 백성이 주의 뜰에 거하게 되니(사 14:1; 시 65:4) 그 은혜의 비밀이 하나님의 뜻에만 있다(3.21.5).

역사상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그 분의 선택은 어떤 법에도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유롭다. 선택의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지므로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사랑하셔서 다른 민족들보다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한 때 전체로 택함 받는 민족들 가운데서도 또 어떤 사람은 ‘두시고’(retinere)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repudiare).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말 1:2-3; 롬 9:13). 모두 이삭의 아들들로서 언약의 후손들이지만 ‘은혜의 놀라운 비밀에 따라서’ 야곱만이 택함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mutatio)에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Dei gratia magis specialis)가 나타난다(3.21.6; 3.22.4).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이스라엘 자손을 뽑았지만 그 중에서도 ‘남은 자들’(reliquiae)에게만(롬 9:27; 11:5; 사 10:22-23) 중생의 영을 부어주신 것은 구원이 혈육에 따르지 않고 언약을 좇아 그 분의 자비에서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례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구원 받을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만이(갈 4:28)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된다. 이방인도 이스라엘의 수(數)에 들게 되니(신 32:9; 왕상 8:51; 시 28:9; 33:12), 이는 선택의 은혜가 지체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을 영적인 후손들에게만 있음을 구약 시대에 미리 예표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gratuita misericordia)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생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벌로 부르신다. 이러한 ‘부르심’(vocatio)이 선택의 증거이다. 부르신 자는 의롭다 하시고, 거룩한 길에 서게 하시고, 종국적으로 영화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구원으로 받아들이심’(assumere in salutem), ‘멸망 가운데 버려두심’(in exitio devovere) 사이에 있다(3.21.7).


3. 예지예정론 반박

하나님께서 공로를 미리 아시고 자신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서 선택했다고 하는 예지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왜곡한다.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미리 자질을 헤아리고 그 ‘예지’(praescientia)에 따라서 작정했다는 교설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experientia)이 밝히 증거하는 진리이다. 천사들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록 원죄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심이 영원히 정하여졌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지체들로서 선택하셨다. 이는 그들의 가치 여하를 불문하고 택하심이니, 택자들의 ‘공로’(meritum)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분의 ‘기뻐하심’(beneplacitum)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2.21.5; 2.22.1).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이 있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무조건적 선택을 뜻한다. 사람의 ‘가치’(dignita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믿는 은혜만이 역사한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으므로 자질이 예정에 선행하지 못한다. 선택에는 이러한 목적이 있지만, ‘그 기쁘신 뜻대로’(pro voluntatis suae beneplacito), 이 말씀이 ‘더욱 우월한 원인’(causa superior)이 된다(3.2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은 오직 자신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는다(딤후 1:9). 구원의 작정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는다(롬 9:11).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에 따라서(엡 1:5, 9)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를 자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도구로서 삼고자 하심이었다(엡 1:6, 12, 14). 거룩함이 선택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거룩함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는냐’(롬 11:35).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양자 삼으심’(adoptio)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ex vocatione Dei)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은 부르셨으나 이스마엘과 에서는 그리하지 아니하셨다(창 21:12; 25:23). 하나님께서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 원인을 그 분의 ‘은밀한 선택’(arcana electio) 외에서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우리의 전적 무능과 부패를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다. 공로로 말하면,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리하지 아니하셨음이 다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출 33:1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신다고 함은(롬 11:2; 행 2:33) 그 분께서 자질을 헤아리시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시사 미리 정하신 백성을 마음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정하신 하나님께서(벧전 1:19-20)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롬 9:23) 삼으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라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2.22.4-6).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의 비밀을 친히 말씀하셨다. 택자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셨다(요 6:37, 39; 15:19; 17:6, 9).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백성을 자신께서 택하셨다고 하심으로써(요 13:18) 함께 일하시고 경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셨다. 창조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협약하셔서 아들을 보내시사 아버지께 속한 백성을 끝까지 보전하시도록 하셨다(요 17:11-12). 우리가 아들을 믿고 아들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선물’(patris donatio)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양자됨이 오직 아버지의 은밀하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3.2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논법에 따르면 선택이 사람의 공로에 종속된다(3.22.9).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의 헤아리심과 긍휼’에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자질로 선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먼저 그 분을 선택한 것이 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을 받아야 할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gratiam Dei non invenire eligendos, sed facere)”(3.22.8).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있다(요 1:12-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만 아버지를 본다(요 6:46). 먼저 보내심이 있고 믿음이 따른다(요 6:39-40).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만이 영생에 이르는 소망이 된다(딛 1:1-2). 믿음은 선택의 ‘보증’(pignus)이 된다. 선택이 ‘믿음의 어머니’(fidei mater)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불변하는 항구성’(inflexiblis electionis constantia)에는 ‘견인’(perseverantia)의 은혜가 함께 제시된다(3.22.10).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소위(所爲)를 앞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를 주신다(3.24.3).


4.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와 마땅한 형벌(poena debita)

예정의 경륜은 오직 하나님의 ‘뜻’(voluntas)에 달려있다. 아무도 신적 경륜을 두고 이유를 물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함에 대한 최고의 규준’(summa perfectionis regula)이며 ‘모든 법들 중의 법’(legum omnium lex)이다(3.23.2). 진흙이 토기장이와 쟁론하여 그릇의 어떠함을 다툴 수 없다(롬 9:21-23). 그러하듯,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유기가 없다면 선택도 없게 될 것이다(3.23.1). 하나님의 은밀한 뜻은 사람의 잣대로 잴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롬 9:19-23; 11:33). ‘성실한 무지’(fidelis ignorantia)가 ‘무모한 지식’(temeraria scientia)보다 낫다. 누가 깊음을 알되, 그 밑바닥 까지 미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예지하시되 그냥 방임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작정대로 주장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사물들의 필연성’(rerum necessitas)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시 115:3). 사람의 넘어짐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다만 사람은 ‘자신의 죄악 때문’(suo vitio)에 넘어진다.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로되, 그 원인은 그 분의 예정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의 불순종에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이 무책임한 사람을 만든다는 비난은 합당하지 않다(3.23.2-9).

하나님의 예정은 편파적이지 않다. 구원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나 성품에 따른 차별이 없다(갈 3:28; 약 2:5; 골 3:25; 엡 6:9). 선택과 유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역사할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백성에게는 ‘마땅한 형벌’(debitam poenam)을 부과하신다. 그러나 선택된 백성에게는 ‘공로 없는 은혜’(immeritam gratiam)를 베푸신다. 주께서는 자비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으나, 심판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값 없는 은혜를 나누어 주시지는 않는다(3.23.10-11; 3.24.8-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사람들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는 사람마다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살전 4:3; 엡 1:4; 2:10). ‘주의 마음’을(롬 11:34) 알 자 없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3.23.12-14).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부르심’(vocatio, appelatio)과 ‘선택’(electio)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확신되는 ‘내적인 소명’(interior vocatio)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된다(3.24.1-3, 8).
만세 전의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되었다.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면 무조건적 선택이 무의미하다. 오직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 값 없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으로부터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버어나드가 말했듯이, ‘하나님 자신께서 나에게 전가하시려고 작정하지 아니하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요 6:35), 그 떡을 먹는 자마다 죽지 아니한다(요 6:51, 58). 오직 그 분을 믿는 자마다 그 분의 떡을 먹는다(요 3:16). 우리는 양이며 그분께서는 목자가 되셔서(요 10:3)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신다(요 6:37, 39; 17:6, 12). 그리고 끝까지 지키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다시 내어 쫓김이 없으며(요 6:37), 하나도 버림이 되지 않으며(요 6:39), 아무도 뽑히지 않는다(마 15:1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백성만이 견인의 은혜를 누린다. 영원한 구원의 작정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으므로(3.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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