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부인하는 경건에 순종하라

오직 여호와를 즐겁게 인정하며 온전한 소망의 삶 살아야

 

[제18강좌] 그리스도인의 삶: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기독교강요 3.6.1-3.10.6)


1.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다룬 이 부분은 별도의 한 작은 책으로서 ‘황금의 소책자’라고 인구에 회자된다. 이곳에서 칼빈은 성경 말씀으로 ‘삶을 형성하는 방법’(ratio vitae formandae)을 ‘간단하게’(breviter) 제시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논술의 명석함과 정연함을 가지고 장황하게 삶의 윤리를 논하지만 생명에 이르는 ‘보편적인 준칙’(regula universalis)을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움’(novitas)이 포함되어 있다. ‘중생의 목표’(scopus)는 이 새로움으로 하나님의 의와 그것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 사이의 ‘조화와 일치’(symmetria et consensus)를 이루어내는데 있다(3.6.1).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에게는 ‘의에 대한 사랑’(amor iustitiae)이 없으나 성령의 역사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서 하나의 ‘규준’(norma)으로서 수립될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열의’(studium)를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가르친다(레 19:2; 벧전 1:15-16). 우리가 하나님께 결속되는 끈은 거룩함이다(3.6.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셨을 때(고후 5:18), 그 분을 ‘본’(exemplar)으로 세우셔서, 그 분을 우리의 생활에 드러내고자 하셨다. 우리가 양자된 유일한 ‘고리’(vinculum)가 그리스도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인치고자 하셨다(히 1:3). 여기에 성경이 교훈하는 은총의 인과관계가 ‘그러므로’(ex quo)라는 수사의 반복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 분의 자녀로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지극한 배은망덕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말 1:6; 엡 5:1; 요일 3: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음으로 정결케 하셨으며 세례를 통하여서 그 정결함으로 자신과 교통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다시금 더러운 것들로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온당치 않다(엡 5:26; 히 10:10; 고전 6:11; 벧전 1:15, 19). 그 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지체들로서 어떤 흠이나 점으로 우리 자신을 흉하게 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엡 5:23-33; 고전 6:15; 요 15: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두고 진심으로 하늘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골 3:1-4). 성령께서 우리를 성소들로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서 빛나도록 하되 죄의 더러움으로 우리를 더럽히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하늘의 불후(不朽)함과 사라지지 않는 면류관을 받도록(벧전 5:4)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까지 그것들을 순수하고 흠 없이 지키도록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살전 5:23; 빌 1:10)(3.6.3).

그러므로 참다운 성도는 유창한 말과 헛된 사색에 사로잡혀 궤변을 일삼으며 욕망에 젖어서 썩은 옛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엡 4:22, 24), 그리스도를 ‘선생’(magister)으로 삼는 ‘제자’(discipulus)로서 마땅한 처신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그 삶이 성경의 가르침 즉 ‘교리’(doctrina)에 부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교리로부터 출발한다. 교리는 종교의 전체를 담고 있다. 교리는 우리의 마음속 가장 싶은 곳으로 들어와서 일상생활에 스며든다. 그리하여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한다(3.6.4). 복음은 성도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역사한다. 그러나 아무도 지상의 삶 가운데 ‘복음적 완전’(evangelica perfectio)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성실함’(integritas)을 요구하신다(창 17:1; 시 41:12). 지상의 삶의 가치는 ‘선 자체에’(ad ipsam bonitatem) 이르도록 쉬지 않고 주의 길을 가는 것에 있다. 이는 육체의 연약함을 벗어 버리고 ‘그 분과 충만한 사귐에 이르기 까지’(in plenum eius consortium) 계속되어야 한다(3.6.5).


2.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성도의 삶은 삶 그 자체를 예배로 드리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이 명령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롬 12:2).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은(갈 2:20) 심령이 새롭게 됨으로써(엡 4:23)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기독교 철학’(christiana philosophia)의 요체는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라는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부인함(abnegatio nostri)에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nostri non sumus):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위를 좌우하지 말게 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을 좇아서 유익한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지 말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자.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dei sumus):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의지가 모든 우리의 행위를 다스리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합당하게 드려서 오직 진정한 목표를 바라며 노력해 가도록 하자(롬 14:8).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고 이성의 지배와 다스림을 벗어 버린 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얼마나 복된 것인가! 자기 유익을 구함은 역병과 같아서 가장 신속하게 우리를 파멸로 인도할 것이니, 구원의 유일한 정박지(碇泊地)는 아무 것에도 지혜롭고자 아니하며 스스로 어떤 것도 뜻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이끄심만 따름에 있다”(3.7.1).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의 영광에 합한 것을 구하는 삶이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그 분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한다(3.7.8-9). 자기애에 빠져 있는 자신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 대한 염려를 내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고, 그 분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3.7.2).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먼저 온갖 경건치 못한 것들과 정욕에 사로잡힌 것들을 내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늘의 기업’(coelestis haereditas)을 바라며 이 땅의 나그네 삶을 근신과 정절과 절제와 공평으로(딛 2:11-14) 살아가야 한다.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투쟁욕과 이기심은 가장 무서운 역병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받은 자로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낫게 여기는(빌 2:3)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먼저 받은 자로서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한다(롬 12:10). 나는 나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자기부인이 없는 곳에는 교만과 억측만 있을 뿐 진정한 겸손은 배태되지 않는다(3.7.4).

‘사랑의 규범’(regula dilectionis, caritatis)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고전 13:4-5) 청지기와 같이 공공의 선(bonum commune)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쪼개어 나누는데 있다(벧전 4:10). 모든 사람을 향하여,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헤아려서, 선을 행함이 마땅하다(히 13:16). 더욱이 믿음의 가정들을 향하여, 그들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고, 더욱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직무’(munus caritatis)는 외면적인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긍휼과 박애의 의식’(miserticordia atque sensus humanitatis)을  품을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단지 바깥에 있는 타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에 속한 ‘지체들간의 교통’(inter membra communicatio)에 다름 아니다(3.7.5-7). ‘경건의 법칙’(pietatis regula)은 운명이라는 소경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 즉 섭리 안에 두는 것이다(3.7.8).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여호와를 즐거이 인정하자. 자기를 부인한 경건한 마음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니,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짊(crucis tolerantia)이다.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모두 십자가의 일부분이었다. 주님께서 친히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얻도록 하셨다(롬 8:29).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함이 그 분의 영광에 함께 이르는 길이다(행 14:22; 빌 3:10-11). 역경의 고난이 곧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체’(societas)를 이룸에 대한 보증이다(3.8.1). 십자가를 짊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생 순종함이다. 십자가의 시련을 통하여서 우리는 아버지의 깊은 뜻과 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두고 기도하였듯이 다윗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심에 대해서 근심하였다고 노래하였다(시 30:6-7). 고난은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룸으로써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의 자리에 온전히 서는 것이다(3.8.2).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caecus amor sui)은 피할 수 없는 병과 같으나 고난은 오래 참음으로 연단을 이루는(롬 5:3-4) 약(藥)과 같다. 징계는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히 머무는 참 자녀의 표가 된다(잠 3:11-12; 히 12:8). 징계는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다(고전 11:32). 그러므로 의를 위한 고난 받음이 ‘특별한 위로’(singularis consolatio)가 된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이(행 5:41) 그 분을 구주로 모신 우리에게 합당하다. 우리의 산 소망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으므로(딤전 4:10)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워할 일이다(벧전 4:12-13).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애통하심이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그 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서 그 분과 함께 영광에 이른다(롬 8:17).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그칠 수 없다. 우리는 ‘십자가의 수난’(crucis amaritudo)을 ‘영적 기쁨으로’(spirituali gaudio) 조절해야 한다(3.8.3-11).


3. 미래를 묵상하며 현재를 사는 삶

성도에게는, 지상의 삶을 마치면 영생의 ‘면류관’(corona)이 마련되어 있다.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meditatio futurae vitae)이 없다면 ‘십자가의 훈련’(disciplina crucis)을 감내(堪耐)할 자 아무도 없다(3.9.1). 인생은 연기나 그림자 같으니(시 102:3, 11), 삶의 공과(功過)를 누가 스스로 헤아려 기뻐하고 슬퍼할 것인가? 그러나 ‘지상의 삶의 비참한 조건’(misera tessestia vitae conditio)이 전혀 헛되지만은 않으니, 이는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후에 받을 하늘나라의 영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기업’(aeternae gloriae haereditas)을 주시기 전에 지상의 삶 가운데 그 분의 부성적 사랑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총이다(3.9.2-3).

지상의 삶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천상의 삶에 비할 바 못된다. 천상이 고향이라면 지상은 타향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천상의 복지(福地)에 비해서 지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신에서 놓여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면, 육신의 삶이 수형(受刑)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지금은 우리가 주님과 떠나 있으나(고후 5:6) 현세의 삶이 ‘초소’(哨所, statio)와 같으니 육신의 질곡 가운데서 한탄이 있을지라도(롬 7:24) 아직 머무는 것이 유익함이 있다(빌 1:23-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육체의 장막을 벗고 나면 우리가 하늘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죽음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완전한 것을 입고자 함이다(고후 5:2-3).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학교’(schola Christi)에서 배우자.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소망의 삶을 살자. 비록 우리가 ‘도살당할 양’(롬 8:36)과 같을지라도, 끝내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심으로(계 7:17; 사 25:8) 우리의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실(고전 15:19)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러므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오직 ‘부활의 권세’(resurrectionis potentia)를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그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것을 이기는 은혜를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unica nostra consolatio)가 된다(3.9.4-6).

지상의 ‘나그네 삶’(peregrinatio)을 살 동안에(레 25:23; 대상 29:15; 시 39:13; 119:19; 히 11:8-11, 13-16; 13:14; 벧전 2:11) 우리는 육의 무절제를 억제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힘써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선물’(dona)로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fines)대로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만물은 단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창 2:9; 시 104:15).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단지 동물적인 삶을 사는 것에 그치게 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 받은 대로 마땅한 ‘즐거움’(oblectatio)을 얻게 하셨다(3.10.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시되 언젠가는 청산해야 할 것으로 위탁하셨다(눅 16:2). 그러므로 있는 자도 없는 자 같이 사용할 것이다(고전 7:29-31). 과도히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절제의 삶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고유한 ‘소명’(vocatio)을 주셨다. 소명에 따른 삶은 지상에서는 낮고 천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3.10.3-6).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