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적 회개’로 구원에 이르라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심…진실한 두려움으로 죄 고백해야


[제17강좌] 중생으로서의 회개: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삶(기독교강요 3.3.1-3.5.10)


1. 육의 죽음과 영의 삶

복음은 믿음의 말씀이다.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음의 총화’(總和, summa evangelii)가 ‘회개’(poenitentia)와 ‘죄사함’(remissio peccatorum)이다. 이 두 가지로 성도는 ‘새로운 생명’(vita novitas)과 ‘값없는 화목’(reconciliatio gratuita)을 얻는다. 죄사함을 얻고 은혜를 받음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말미암는다. 회개는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온다(3.3.1). 

회개는 ‘죽음’(mortificatio)과 ‘삶’(vivificatio)의 두 요소가 있다. 자신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직 ‘참 회개’(poenitentia vera)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함으로써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회심’(conversio)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회심’ 혹은 ‘되돌아옴’(reditus)을, 헬라어는 ‘바뀜’(mutatio)을 의미한다. 회개는 전체적으로 회심으로 이해되며, 회심은 믿음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다음을 회개의 좋은 정의로 삼을 수 있다.

“실로, 회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며 진지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게 된다. 회개는 우리의 육과 옛사람에 있어서의 죽음과 영에 있어서의 삶으로이루어진다”(3.3.5).

첫째로, 회개는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이는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화’(transformatio)를 의미한다.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겔 18:31), 마음과 뜻을 다하여(신 6:5; 10:12; 30:2, 6, 10)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다(신 10:16; 30:6; 렘 4:1, 3-4).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약 1:8)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바라는 것이다(3.3.6).

둘째로,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ex serio Dei timore) 생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바라보고 미리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다 내어놓는 것이다(렘 4:4; 행 17:30-31). 오직 세상의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고후 7:10) 하는 것이다(3.3.7).

셋째로, 회개는 육에 대해서는 죽고 영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다. 진정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맺는 삶을(눅 3:8; 행 26:20; 롬 6:4) 지향한다(3.3.5). 회개의 열매는 행악을 그치고 선을 행함으로 나타난다(시 37:3, 8, 27; 사 1:16-17). 참 회개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자기를 부인함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는(엡 4:22-24) 것이다(3.3.8).

회개의 두 요소인 죽음과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함으로’(ex Christi participatione) 말미암는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분과 함께 죽었으므로 그 분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롬 6:6, 8, 11). 다시 산 자로서 우리는 주의 영으로 새롭게 되므로 새사람을 입는다. 그리하여 지식에까지 새로움을 받는다(고후 3:18; 엡 4:23-23; 골 3:10).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중생’(regeneratio)으로 해석된다(3.3.9).


2. 계속적인 회개의 삶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로 중생한 사람은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삶을 산다. 그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산다. 이제는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그 분의 영의 소욕대로 산다. 다만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으니, 이는 그 안에 탐심을 촉발시키는 ‘부싯깃’(formes)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의 지상의 삶 동안에 계속된다. 죽을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도는 여전히 ‘정욕’(concupiscentia)에 매여 산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은 단지 ‘연약함’(infirmitas)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죄’(peccatum)가 된다(3.3.10).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peccati regnum)는 끝이 나지만 ‘죄의 질료’(peccati materia)는 여전히 남아 있다. 죄는 지배력을 잃으나 여전히 성도들 가운데 남아있다. 죄의 형벌인 사망의 ‘죄책’(reatus)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롬 6:6) ‘죄의 법’(lex peccati) 즉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에게도(롬 8:2) 여전히 죄의 여적(餘滴)이 있다(3.3.11). 사람의 ‘욕심’(cupiditas)과 ‘육욕’(libido)은 ‘무질서한 것들로서’(inordinata) 하나님의 ‘질서’(ordinatio, avtaxia)에 반한다. 그러므로 죄이다(3.3.12).

어거스틴과 암브로시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법은 폐지되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죽을 육신 가운데 남아서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삶 동안에 죄를 아예 없애지는 못할 것이로되 다만 죄가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2). 죽음의 죄책은 옛사람과 함께 죽었으나 죄는 여전히 남아서 역사한다(3.3.13).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것들’ 가운데 놓여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강함’이 함께 역사하는도다(3.3.14)!

성도의 삶 가운데 맺는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거룩함’(sanctimonia)과 ‘순결함’(puritas)이다. 내면적인 감동이 없는 외면적 회개로서의 참 회개란 없다. 참 회개는 한 마음을 품고(약 4:8), 그 마음을 찢고(욜 2:13)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3.3.16-17). 거듭남에 이르는 단회적 회개와 거룩함에 이르는 반복적 회개는 구별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죄사함이라는 열매를 함께 맺는다(막 1:4; 눅 3: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전반).

회개의 제 일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misericordia)에 있다(사 55:6-7). 회개함으로써 공로를 얻어 마땅한 죄사함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 회개’(poenitentia perpetua)로 거룩함에 이르는 죄사함을 받음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3.3.18-20).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singulare donum)이다.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행 11:18)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2:10).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은 성도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사 63:17) 성령의 조명에 따른(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계속적 회개로써(히 6:4-6), 영생에 이름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 7:10)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 줄곧 역사한다(3.3.21-25).

성도의 삶은 계속적 회개의 삶이니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경향’(affectio)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말미암은 ‘간절함’(sollicitudo)이 있다. 둘째, 자신의 옳다함을 버리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정결함에 이르고자 하는 ‘변명’(excusatio)이 있다. 셋째, 마음속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에 대해서 뉘우치는 ‘분함’(indignatio)이 있다. 넷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근심하며 떠는 ‘두려움’(timor)이 있다. 다섯째, 마땅한 의무를 기꺼이 순종하려는 ‘사모함’(desiderium)이 있다. 여섯째, 진정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다음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심’(zelus)이 있다. 일곱째, 엄격히 죄의 값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징벌’(vindicta)이 있다. 버나드가 말했듯이, ‘회개는 마치 쓴 쑥에 꿀을 섞어 먹음과 같으니 달게 해서 먹으면 쓴 것이 약이 된다’(3.3.15).


3. 가톨릭의 궤변

오직 주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사 61:1; 눅 4:18)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다(마 11:28). 회개는 ‘죄사함의 원인’(causa remissionis peccatorum)이 아니다(3.4.3). 크리쏘스톰이 말했듯이, ‘회개는 죄를 씻어내는 약이며 하늘의 선물이자 놀라운 능력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회개가 ‘마음의 통회’(contritio cordis), ‘입의 고백’(confessio oris), ‘행위의 보속’(satisfactio operis)으로 이루어진다고 궤변을 주장한다(3.4.1).

첫째로, 마음의 통회 자체가 회개의 은총을 받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회개에 있어서, 마음을 찢는 그 자체에서 능력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찬미함이 더욱 합당하다(3.4.3).

둘째로, 죄가 제사장 앞에서 고백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변역하리니”(히 7:12),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함이 합당치 않다. 심지어 구약의 제사장도 죄의 고백을 듣는 직분이 없었다(신 17:8-9). 서로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은(약 5:16) 죄를 듣고 사하는 권세를 특정인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죄의 고백도 그러해야 한다. 열쇠의 권한은 주님의 교회에 주신 선포하는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제에게 사죄권을 부여함이 아니다(3.4.4-6, 14-15). ‘죄를 고백하는 유일한 방법’(una confitendi ratio)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죄를 사하시고, 잊고, 지워버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그 분께 고백하자. 그 분께서 의사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처를 그 분께 보여드리자. 상처 입으시고 징계를 받는 분이 그 분이시므로, 그 분께 평화를 간구하자. 중심을 헤아리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 자신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자. 종국적으로, 그 분께서 죄인을 부르시므로,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께 나아가자”(3.4.9).

셋째로,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회개로 말미암아 ‘죄과’(罪科, culpa)는 용서함 받았으나 여전히 ‘벌’(poena)이 보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갚아야 된다는 가톨릭의 사상은 은혜의 교리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이다. 죄사함은 값없는 용서로 인한 것이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유일한 대속물로서 우리를 위한 ‘무름’(satisfactio)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보속’(補贖, satisfactio)이 가당치 않다(3.4.25-26). 우리가 스스로 갚아서 구원에 이른다면 어디에서 양심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얻고 화목에 이르게 될 뿐(골 1:14, 20), 아무 것으로도 먼저 드려서 갚음을 얻을 수 없다(3.4.27). 사제가 열쇠의 권한을 가졌으므로 이러한 보속을 대신 감당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3.4.20-23). 죄를 가져가신 분께서 벌을 친히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구속’(avpolutrwsij)을 이루심은(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자신을 죄의 값 즉 ‘속전’(avntilutron)으로(딤전 2:6) 드리셨음으로 말미암는다(3.4.30). 가톨릭의 연옥설과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설에 기초하므로 전혀 비성경적인 사설(邪說)에 불과하다(3.5.1-10). 우리에게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그저, 값없이 구하는 공로 밖에 없다. 전적으로 의지(依支)하는 공로, 전적으로 기대는 공로, 그것은 사실 공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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