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평짜리 빈 교회 보고 “여기다”


▲ 개척지 혜린교회 앞에서 사진을 찍은 이남웅 목사와 사모.

그 깊고도 아름다운 산중에서 새소리와 약초 캐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와 말씀연구와 작은 목회에 만족하며 지내던 나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었다. 그곳에 부임한지 2년쯤 되던 때였다.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하라.” 잠자듯 산골에 묻혀 있는 나를 깨우시는 성령의 역사였다.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마음 속에 묻어 두었던 서울이나 수도권에 교회를 개척하려던 꿈이 되살아났다. 이런 성령의 깨우치심이 있은 후 나는 이를 위하여 칠보산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10여 년 전부터 예수님처럼 한번 40일 금식기도를 해보았으면 하던 소원이 있었는데 주께서 개척하라 하시는 이때에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가 1980년 여름이었고 내 나이 34세 때였다. 물론 결혼도 안했고 8년 전 평창시절 다수 교회에 설교하러 다닐 때 고등학교 2년생이던 현재의 사모와 약혼만 한 상태였다. 내가 워낙 일찍 목회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와 나이 차이는 7살 밖에 안되었다. 기도원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그녀에게 “내가 금식 기도하다가 죽을지도 모르니 죽거든 1년을 다른 남자들을 사귀지도 말고 나만 생각하다가 1년 지나거든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유언처럼 얘기하고 떠났다.

칠보산 기도원 금식관에 네 명의 전도사들이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둘은 이미 하나님께로 갔고 하나는 서른 두 살의 성결교 전도사였는데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렸다. 금식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금식 아흐레째 되는 날 개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확신이 왔다. 그런데 37일이 되던 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거실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기절해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이 데려다 방에다 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저 아래쪽에서 오신 어떤 목사님의 기도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주여! 주의 종들은 어째서 이렇게 고생해야 합니까...” 울먹이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40일 금식을 마치고 안양과 인천에 있는 누님들 댁에서 신세를 지며 보호식에 들어갔다. 한 달 두 달쯤 지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는데도 하나님께 응답은 받았으나 교회 개척할 길이 아득했다. 그렇다고 돈 한 푼 없고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있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치니 아무 방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교회 개척한다고 소문을 내 놓았는데 참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로 가는 길에 친구 전도사님 하나를 만났다. 지금의 김일곤 목사였다. “개척한다더니 왜 안 해?” “응. 장소를 찾고 있어.” 돈이 없다는 소리는 안하고 마땅한 장소가 없다고 했는데 그가 하는 말이 부천에 우리 친구인 백병덕 목사가 군목으로 있다가 제대한 후 개척을 하려고 25평짜리 홀을 얻어서 3개월을 하다가 150여 명 모이는 다른 교회로 청빙을 받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3주일 전에 맡아서 했는데 자기는 서울 발산동으로 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돈도 필요 없고 보증금 450만원의 이자만 14만원씩 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수십 명의 목사들이 그곳을 와보고는 이곳은 안 된다고 포기한 곳이었는데 워낙 방법이 없던 내게는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못 되었다. 그날 오후 김일곤 전도사와 부천 원미동 88-11에 있는 25평짜리 빈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여기다!” 하시는 감동과 확신이 왔다. 워낙 돈이 없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나에게 주께서 이렇게 개척할 곳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지금의 혜린교회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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