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수 없는 전쟁과 가난의 고통 ...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 아이
희망 없는 그 땅에 '사랑의 힘' 다시 전하는 건 이 시대의 책임

연일 계속되는 한국인 피랍 사건 보도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카불, 칸다하르의 정경들과 낯익은 거리, 건물들,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피랍 사건이 나기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나에게 이런 모습들은 무섭고 위험하게 보이기보다 오히려 안타깝고 가슴 아픈 현실이다.

물론 한국인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내 심장을 터질 듯 흔들어대는 충격이었고, 지난 20여 일 동안은 그들의 생명과 건강이 걱정되어 밤잠이 오지 않는 날의 연속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시간을 탈레반의 잔인한 영상에만 비추어 두려운 기억만으로 남길 수도 없는 것이 내 마음이기도 하다.

2005년 나는 파키스탄 북부 지진 현장에서 지진 피해 이재민들을 위한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굿네이버스는 이미 2002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전쟁과 가난에 숨이 가쁜 아프간 아동들과 여성들을 돕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접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게 되었고, 사업장 지역들을 방문하면서 이들이 가진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고통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의 고통은 결코 자신을 숨기는 법이 없다. 아이들의 얼굴에, 옷과 신발에도, 담벼락에도, 부르카를 쓰고 지나가는 여인들에게도, 거리에 나뒹구는 탱크들의 잔해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상처와 가난을 볼 수 있었다.

파키스탄 지진 피해 지역의 일을 마친 2006년 6월, 나는 아프가니스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인 카불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한국인의 이동이 금지된 파키스탄의 국경지역 페샤와르와 돌캄 국경지역을 지나 카불에 들어섰다. 지나는 길에 파키스탄에서 고된 난민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삶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좋을 텐데…. 그들에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치안이 많이 좋아진 것을 제외하고는 카불로 향하는 그들에겐 먹고 사는 걱정이 지친 난민생활만큼이나 어렵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의 전쟁, 지역 군벌들 간의 전쟁을 수년간 겪으면서 인구 3분의 1인 650만 명이 지속되는 전쟁을 피해 자신의 삶을 떠나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떠나갔다.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 보고서에 의하면 탈레반 정권 시에만 50만 명의 난민이 주변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또한 2006년 한해만 13만 9000명이 아프간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 굿네이버스에서 초등학교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아즈라(가명, 28)는 자신이 겪은 파키스탄의 난민 생활의 어려움을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해 마음 한 구석에서 밀려오는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본 첫 번째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눈물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에도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이 많다. 주요 대도시 주변 지역에는 아프가니스탄 마을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난민촌이 있고, 방문자에게는 언제나 뜨거운 차와 사탕을 권한다. 집 내부는 상당히 깨끗해서 2층짜리 반짝이는 파키스탄의 집보다도 내부가 깨끗했다. 이 난민들은 파키스탄에서 무시와 배고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들의 고향은 아직 그들이 돌아갈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은 빠른 속도록 철거되고 있었다. 결국 이 난민들은 파키스탄을 떠나 카불 시 난민 슬럼 지역으로 돌아가 다시 인력시장을 배회하며 굶주림을 이겨내야 한다. 별다른 희망이 없기는 난민 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난민들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오는 속사정이야 어찌하든 외관상으로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새로운 희망과 전쟁 종식의 기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카불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희망찬 변화이다. 하지만 이 현상도 카불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번 피랍 사건이 있었던 가즈니 주 같은 경우는 카불과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발과 변화에서 제외되었던 지역 중에 하나이다.

2007년 2월 이런 가즈니 지역에 탈레반의 세력이 서서히 침투했고, 정부 관리와 경찰 간부를 살해하면서 가즈니 주가 탈레반에 넘어왔음이 중앙정부에 통보되었다.

이렇게 탈레반 세력이 확산되는 이유는 가즈니 주를 비롯한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 주민들이 미군이 자신의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지원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강도와 도적들로부터 계속적으로 치안의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수년간 그들의 삶에서는 개발과 변화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평화유지군의 잦은 민간인 사살은 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평화를 유지시킨다는 외국 군대도 결국은 무력을 통해, 그것도 민간인 사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화를 논하고 있었다. 이들이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탈레반이 자신들의 재산과 안전은 보장해 주는 사람들로 비춰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활동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탈레반들은 지역 주민을 보호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유행한다는 동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잔인성과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회 불안을 초래하기 위해, 일부러 살인 장면을 인터넷에 배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의 증식은 일반 주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프가니스탄 거리를 다니다 보면 싸움의 모습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고, 그 정도는 나조차 무서울 정도이다. 운전을 하다가, 장사를 하다가도 이들의 폭력성은 쉽게 나타난다. 태어나면서 전쟁을 격은 이들은 대부분 가족들 중 한명 이상을 잃었다. 전쟁으로 가난으로 테러로 가까운 친족들을 잃어가면서 내재된 분노 또한 쉽게 표출되고 있다.

굿네이버스가 운영하는 여성교육문화센터는 전 직원이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위한 교육사업과 문화사업을 진행한다. 하루에 약 200명의 여성들이 여성교육문화센터를 이용하고 있다. 차가운 겨울의 한기가 끝나가는 2월 이 여성 센터의 행정직원인 리야(가명, 30)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굿네이버스가 운영하는 이브니시나 병원에 입원해 다행히 외국 남자인 내가 병문안 가는 것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히 넘어져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멍 자국과 상처투성이였고, 코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몇 마디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주변 직원들을 통해 그녀가 친오빠에게 구타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쓰고, 그 인권과 보호의 담벼락에 갇히게 된 것은 탈레반에 의해서였다. 심지어 여성들은 굽이 있는 구두도 신지 못했고, 외출도 할 수 없었고, 크게 소리 내지도 못했다.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세상을 쳐다 볼 수도 없었다.

이러한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엔지오(NGO) 직원조차 집에서는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현실임을 직면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한국에 귀국한 중요한 이유는 내 첫 아이의 출생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임신 7개월에 미리 한국에 귀국해 있었고, 나는 출생일에 맞추어 한국에 조기 귀국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피랍 사건을 아프간에서 맞이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작고 귀여운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동시에 내 뇌리에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물통을 들고 다니는 조그만 아이들…. 수도시설이 없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물 담당은 늘 아이들이다. 펌프질을 돕는 아이는 우물펌프 옆에서 놀기도 하고 잠도 잔다. 한겨울에도 맨발에 반팔을 입고 물동이를 들고 가는 아이들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이 땅은 전쟁과 가난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이들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유아 사망률이 세계 1위로 첫 돌을 맞이하기 전 20%아이들이 죽어간다. 산모 또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수가 상당하다.

굿네이버스는 카불 주 외각에서 3개의 보건소를 운영하면서, 산파를 통해 시골 지역의 산모와 신생아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주민들은 의료적 필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해 과거에 해 왔던 방식대로 아기를 출산하고 또 고통을 받고 있다. 각가지 질병에 노출되어있고, 아이들은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에서 뛰논다.

아이들의 웃음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을 이 땅 아프가니스탄에서 나는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늘 다짐하곤 했다.

피랍 사건을 통해 나는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굿네이버스 한국인 직원들도 모두 철수해야만 한다. 6년을 함께 일 해온 현지 직원들도 그 노력과 열성들도 이 안타가운 납치사건에 묻어 버려야만 하며, 매일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아오던 1000명의 사람들도 뒤로 두고 떠나야 한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굿네이버스와 같은 엔지오들이 하는 일들이 동 역사, 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전달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후기)
굿네이버스는 한국인 직원 철수 이후에도 현지 직원을 주변 국가에서 훈련시켜 현지인을 통한 지속적인 사업 방안을 간구하고 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생명력 있는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글=고성훈 과장/굿네이버스 국제협력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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