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깎아 빚은 ‘영혼의 울림’

평생 소리의 길을 따라온 장인의 작업실은 나즈막했다. 대문에 이어진 골목길보다 한폭 아래에 위치한 작업실 입구에는 ‘궁성국악사’(窮聲國樂社)란 오래된 현판이 겸손하게 걸려 있었다.

거문고 악기장인 최동식 장로(65·남성교회·무형문화재 제12호), 그의 삶은 금(琴)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형태와 빛깔을 오롯이 형상화해내는데 바쳐진 외길 인생이었다. 그 외길 인생이 어느덧 40여년의 성상(星霜)을 거쳐왔다. 오래된 소리가 침묵의 형상을 띠듯, 허름한 그의 작업실에는 늦은 여름의 고요가 머물고 있었다.



▲뼈를 깎는 세월들

눅눅한 세월의 냄새가 풍겨나는 크지 않은 세개의 방에는 국악기들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형태의 금들은 줄을 매거나 아직 매지 않은 모습으로 방 벽을 따라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어른 키를 넘는 대형 금에서부터 아이들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꼬마 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쟁에서 단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와 모습의 악기들이 방 이곳저곳의 공간을 나누어 차지한 채 사이좋게 어울려 있었다.

“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64년경입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서울 처삼촌의 작업장에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최 장로의 나이가 25세. 100년 가는 금줄을 만든다는 김명칠 장인의 아들 김광주 선생이 이웃해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는 얼마 뒤 전주로 내려와 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가야금과 거문고는 전문국악인들만이 사용하던 악기였다. 당시 악기값이 3000~5000원. 비싼 것은 1만원을 호가했고, 최상급은 1만 5000원선에 달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액수의 정도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당시의 유명 국악인들이 그가 만든 금을 애용했다. 그는 일일이 수공업으로 제작한 금을 직접 싸들고 사용자에게 건네주었다. 서울 같은 경우는 밤 11시 30분경 차를 타고 상경해 새벽 4시 반경 도착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던 국악기는 75년 무렵부터 수요가 급증했다. 각급 학교에서 국악을 가르치면서 악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탓이었다. 그는 납품을 위해 3~4개의 금을 짊어지고 전국의 학교를 다 돌아다녔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가야금과 거문고는 2000여대 이상. 수요가 많았던 84년 한해에만 300여대를 만들었다.

최 장로는 금을 만들면서 우리 오동만을 고집했다. 우리나라 오동은 결이 촘촘하고 단단해서 소리가 맑고 깊은 탓이었다. 예부터 딸을 낳으면 혼수준비로 심었다는 오동나무는 빨리 자라면서도 강해서 쉽게 불에 타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뎌냈다. 전남 장수와 구의계곡 등에서 구해온 오동나무를 최 장로는 다시 3~5년씩 비와 바람, 눈 속에서 말렸다. 모진 세월을 견딘 오동일수록 그 울림이 맑고 아름다웠다.

그런 오동을 깎고 파내고 다듬어 울림통을 만들고 거기에 줄을 매는 작업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소나무 방망이에 감은 명주실을 다시 물에 넣어 풀어내는 일은 특히 겨울이면 손을 부스러뜨리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견뎌냈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오동나무를 닮아갔다. 환경이 척박해 쉽게 성장할 수 없었던 오동나무가 온갖 시련속에서 더욱 강인해지고 단단해져 강하고 맑은 소리를 울려내듯, 그는 고통속에서 오히려 장인으로서의 기량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그런 외로운 길의 끝에서 그는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경제적인 궁핍을 견뎌내며 소리를 따라가는 외길 인생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세월”이었다.



▲국악찬양의 소망

고독한 외길 인생에서 그의 삶을 지탱해 준 든든한 버팀목은 신앙이었다. 10대 때 처음 신앙을 접한 그에게는시작이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서당훈장의 아들로 교회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가족과 불화하면서도 그는 부흥사경회가 열리면 10리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50이 넘은 나이에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해주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을 때 그는 담담했다. 단단한 믿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던 탓이다. 수술대 위에서 너무도 평온한 그를 보고 오히려 간호사들이 신기해했다. 떨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으면 편안합니다”고 대답했다.

그런 그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소망은 바로 국악찬양단. 진정한 우리의 소리와 악기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일이다. 그동안 몇번 교회에서 시도를 했지만 목회자들의 반응이 특히 냉담했다. 진정한 우리의 소리지만 우리의 것이 오히려 더 낯설고 어색한 시절이 그로서는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

이런 그의 생각에 공감하고 호응하는 이들도 있지만 국악찬양단을 만든다는 일이 아직은 힘에 벅차는 일이다.경제적인 여건과 사람, 애정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긴 시간 금을 만들어오며 맑고 아름다운 소리는 많은 시련을 거치며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깊은 소리로 찬양을 하는 일이 더 의미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최동식 장로 프로필 | ▲전북 공예품경진대회 동상(1994), 특선(1995), 입선(1998) ▲전국 공예품경진대회 입상(1995) ▲전승공예대전 장려상(1998) ▲전국 국악기능보존회장 ▲전북 전통공예인협회장 ▲궁성국악사(www.myhome.naver.com/koogak) 대표



(가야금의 줄을 고르는 거문고 악기장인 최동식 장로. 그는 국악찬양단을 통한 찬양예배를 소망으로 가지고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