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들 곳곳에 분산...뮨스터 정부 장악후 광태 보이기도

한 때 경건하고 소박하며 매력적이었던 초대교회의 신앙을 소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던 재세례파, 곧 아나뱁티스트들이 1529년 가톨릭과 루터란이 합의한 스페이어 제국회의 결정에 따라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미 재세례파에 대한 공적인 재판은 1525년 츠빙글리의 전적 동의 아래 취리히 신정정치가 이들을 호수에 수장시키도록 사형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박해에 의해 재세례파 교도들은 상당수의 지도자들을 잃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처럼 초기의 신앙색깔을 상실한 채 유럽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일부는 1534년 라인강 지류에 위치한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뮨스터를 새 예루살렘으로 지명하고, 지역정부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선지자들의 특이한 양태와 부족장들의 부도덕한 모습까지도 부활시켰는데, 네덜란드의 일부 재세례파는 선지자 이사야의 흉내를 내어 벌거벗은 채 거리를 질주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이사야처럼 화로에 가서 활활 타는 석탄을 집어 자기 입술에 대기도 했다. 재세례파의 이같은 행동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루터란은 연합군을 결성, 성을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10여년에 걸친 박해 후 일부 과격한 재세례파가 보인 여러가지 광태로 인해 많은 역사가들은 이들의 초기 신앙모습까지 왜곡해버릴 위험성까지 안고 있어 재세례파에 대한 정당한 해석 여부가 교회사의 주요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실제로 초기 재세례파의 신앙모습에 대해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는 『그들은 거짓말 하거나 속이거나 욕하거나 싸우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마시거나 하지 않는다. 사치도 찾아 볼 수 없다. 반대로 겸손하고 인내심이 많고, 솔직하고, 조용하고 점잖으며 신사적이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성령이 있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며 매우 긍정적인 논평을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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