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샛별 등 찬사...비로소 자리매김

최근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들이 새롭게 자리 매김되고 있다.


14세기 영국 옥스포드대학을 중심으로 교황의 불합리한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하여」 「시민의 통치권에 대하여」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 등의 논문을 발표해 사실상 반교황권의 기치를 들었던 존 위클리프는 그후 15세와 16세기에 걸쳐 전개돼 온 종교개혁사에 있어 「샛별」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제기됐다.


실제로 위클리프는 루터에 비해 150여년 앞선 1380년 8월 그의 퀸즈컬리지 연구실에서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며, 모든 평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교회로 거듭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의 논문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부분, 곧 『하나님은 최고의 지배자이시며 그의 통치권에 모든 인간적인 통치권이 의존한다』는 부분과 교회의 재산과 권력에 대해서 밝힌 『이것(재산과 권력)은 은혜로 주신 것이며 또한 그것들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봉사할 때만이 유지되는 일시적인 대여이다, 따라서 죽을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성직자들은 세속적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상실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200년을 내다본 혜안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교회분열시대에 영국 위클리프의 주장을 보헤미아로 옮겨왔던 프라하대학의 사제장 얀 후스 역시 종교개혁의 봉기를 15세기로 전해준 인물로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후스는 『교회의 유일한 법은 성경』이란 주장과 함께 면죄부반대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체포된 그는 1415년 콘스탄츠대성당에서 있은 재판결과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아 화형됐다. 그러나 후스의 사형으로 인해 보헤미아는 20년의 종교전쟁이 시작됐으며,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이단의 괴수」란 쪽지를 머리에 인채 화형을 당하던 후스가 남긴 말, 곧 『내가 거짓증인들에 의해 고소된 사실들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다, 내가 저작하였고 가르쳤고 설교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나는 오늘 기쁘게 죽을 것이다』는 순교자 후스의 마지막 말은 오늘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정도로 그의 교훈은 지속적인 힘을 유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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