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9월 2일 벽안의 27세 청년 토마스는 대동강 가에서 한문 성경 한 권을 전하고 죽어간다. 1948년 「토마스기념전도단」은 복음이 미치지 못한 황해도 옹진으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같은 해 인천에서는 한 명의 전도사와 한 명의 여신도가 길바닥에서 첫예배를 드린다.


이 세가지 사건은 「인천제2교회」를 접점으로 하나의 역사가 된다.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피는 훗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 순교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또한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기념전도단의 이승길 목사와 이삼성 집사는 훗날 인천제2교회 초대 당회장과 2대 당회장이 된다.


188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부터 셈하여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복음전래 60년에는 자유가 없었다. 유학을 숭상하는 군주국가 조선에서도,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신앙의 완전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의 손에 주권이 없는 치세에서는 신앙의 권리도 제한되는 이치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청년 이승길은 평양지구 학생대표로 김구, 이준 등과 함께 서울 상동교회에 모여 을사조약반대결사대를 조직한다. 독립군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1910년 체포된 이승길은 8년 옥고를 치른다(안악사건). 출옥후 「이 시대의 국민들의 올바른 사상지도와 구원의 길은 오직 기독교 신앙운동에 있음을 통감한」 이승길은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3년 졸업하고(17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이승길은 평양노회장이었던 1935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고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한다. 일제의 요주의 인물 이승길 목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예비검속」 또는 혐의로 38회나 구속되는 기록을 남긴다. 일제 패망직전 광복을 준비하는 모임을 주동하여 일경에 체포된 이승길 목사는 평양형무소에서 형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해방을 맞는다(정방산사건).


1945년 8월 15일 민족이 해방되고 1948년 8월 15일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이 이 땅에 섰다. 인민에게 주권이 있는 정체(政體)가 선 것이다.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를 표방하는, 이땅에 들어선 최초의 근대 국가였다.


1948년 6월 6일 인천에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한 집회가 열렸다. 김덕수 전도사의 노방 설교에 신의주 출신 장로교인 최용주 권사(83 생존확인)가 찾아와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인천제2교회의 시작이다.


인천제2교회는 초대 군정관인 패리쉬 소령을 만나 교회를 짓기 위한 목재 원조를 받아 식산은행 사택부지를 구입해서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김 전도사는 미리 준비해 간 설계도면을 그 미군 장교에게 보여주며 『지금 인천에는 저 북녁땅의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수많은 피난교인들이 있는데, 이 교인들을 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인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라며 목재 원조를 요청했다. 우마차 40대 분의 목재를 얻어 40평 규모의 교회당 목조 건물용 자재로 사용하고 나머지 목재는 팔아 663평의 성전대지 구입비를 마련했다. 1949년 4월에 성전 건축이 시작됐다. 성전완공을 위한 부흥회 기간 중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51년 4월 이승길 목사가 제2교회의 문을 다시 열었다. 교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 교인들은 제2교회에 출석하다가 피난 후 돌아온 교인들과, 분단 후 북한 공산당의 억압을 받다가 6·25전쟁과 함께 남한으로 넘어온 황해도 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회당은 6·25전쟁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서너달 방치되어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마루는 깔지 못하여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았으며 지붕에선 비가 샜다. 불란서재 종이 달린 종각만 그대로 남아 은은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6·25전쟁으로 중단됐던 성전공사를 1951년 6월 재개됐다. 공사비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충당됐다. 북에다 재산을 버려두고 월남한 피난민들이 모은 헌금이었다. 여기에 인천 지역 교회들이 교파를 떠나 헌금을 했다.


1952년 3월 21일 성전을 완공했다. 여기에 교회는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모자를 위한 복지시설, 마르다자원을 개원했다. 당시 마르다 모자원에서 신앙으로 상장한 사람들이 이제 50대를 넘겼다. 김귀중 목사(인천인성장로교회, 증경인천노회장)과 임인환 목사(행주교회), 김항길 목사(로스앤젤리스 한인교회) 등이 마르다모자원에서 성장했다.


이승길 목사는 예장합동과 통합이 분열할 때에는 통합준비위원장을 맡아 교단 분열을 막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병석에서도 『건강을 다시주신다면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교회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는데』라며 통탄했다고 한다.


1959년 개원한 삼일유치원은 삼일운동과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그 이름을 붙였다. 그 교육 목표는 「애국적인 나라의 위대한 인물과 천국 일군 양성」이다.


초대 당회장 이승길 목사가 소천하고, 1966년 4월 29일 이삼성 목사가 2대 당회장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이건영 목사가 3대째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렇게, 인천제2교회는 초대 당회장 이승길 목사의 애국정신과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이 전통이 된 교회이다. 여기에 해방후 공산주의의 탄압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 월남 기독교인의 비타협적 신앙이 더해진다.


근대국가 대한민국 건국 50년, 이 시공(時空)에서 우리 기독교회의 한 모습, 아니 어쩌면 전형이라고 할 수도 있는 모습을 인천제2교회에서 발견한다.


국권상실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신앙과 애국의 정신으로 이겨낸 신앙의 선진들, 동족상잔과 이산의 아픔을 남기고 신앙의 자유를 유린한 공산정권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기억, 어찌보면 무모하다 할 만큼 열정적인 성전건축의 과정, 교단 분열의 쓰라린 경험.... 정도의 차이일 뿐 이것들이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걸어온 50년의 역사이다.


역사를 두고 흑백을 따지는 것은 헛되다. 그것 자체가 어떤 독선을 전제할 수 있다.


건국 50년의 역사는 독재와 그 상흔의 역사 50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헌법의 「민주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 50년에 한국 교회는 솔직히 떳떳하지 못하다. 독재라는 극단 앞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라는 또다른 극단밖에 없지만, 한국 교회는 순교자가 되지 못했다. 되돌아 이해해 보건데, 해방과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은 한가지 신앙 실천에 가까웠다. 그만큼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의 경험이 컸다. 그리고 독재 정권은 교회의 이런 속성을 적절히 이용했던 것이다.


인천제2교회 시무장로 21명 가운데 10명과 원로장로 6명 모두가 이북 출신이다. 반기독교적 공산주의를 경험한 이들인 것이다. 이건영 목사는 이 분들의 아픈 경험도 존중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신앙 속에 애국과 투철한 국가관이 스며있는 인천제2교회 이곳에서 유치원부터 청년부까지 성장했다. 잠시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대학부를 지도할 때의 경험을 들려준다. 민주화의 열기가 그어느 때보다 높았던 80년대 말이었다. 그 교회 청년들은 4·19를 기념해 교회에 검은옷을 입고왔으며, 독재타도를 외쳤다고 한다. 인천제2교회의 「반공」교육에서 신앙이 자란 이 목사는 솔직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는 녀석도, 뒤에서 묵묵히 기도하는 녀석도 모두 아끼신다. 나의 경험만을 전부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또다른 사역에 대한 모독이다.』


인천제2교회는 전통이 살아있음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그 전통이 언제나 자랑스러운 결과만을 낳는 것이 아나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세대, 지역, 계층.... 우리를 갈라놓은 수많은 구별들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서로를 존중할 수는 있다. 건국 50년의 대한민국도, 교회설립 50년의 인천제2교회에도 「구별」이 존재하고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50년이라는 역사의 긴 안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 그러지 못할 것도 없다.


이 고답적 인천제2교회에 어느날 공구장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교회의 원로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 이 교회 한 켠에 들어선 농구대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농구를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