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전문가기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시민 사회’라 한다. 지난 80년대 말로부터 9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다. 군사 독재 체제를 몰아내고 시민의 자율 공간을 확보하였다는 뜻이다. 시민은 민주화를 쟁취하여 ‘문민 정부’를 세우고 ‘국민의 정부’를 들여놓았으며 ‘참여 정부’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나 말하고 어디서나 외친다. 아무 것이나 요구하고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시민이 주인이고 시민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라 한다. 우리 역사에서 권리 주장이 이처럼 시끄럽게 날뛴 적은 없었다. 넘쳐나는 주장과 반주장에 시민은 분주하다.
시민의 권리 주장은 요란한데 시민의 책임 이야기는 성글다. 시민은 권리의 주장 너머 공동체의 선에 참여하는 ‘덕목’을 갖춰야 한다. 시민 사회는 이러한 미덕을 갖춘 시민들이 떠받드는 삶의 공동체이다.
국가로부터 얼마 만큼 떨어져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는 시민 사회에 들어섰다 할 수는 없다. 그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가족 중심의 의식 세계로 틀지어져 있다. ‘가족주의’의 틀로 세상을 보고 그 틀로 삶을 가늠한다. 좀처럼 가족의 테두리 너머 넓은 지평으로 관심 세계를 넓히지 않는다. 유교의 가치로 더욱 논리화하고 제도화한 오랜 습속이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대가족 단위가 소가족 단위로 축소되었음에도 이 습속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진치고 있다. 변동의 충격이 클수록 가족주의의 틀을 더욱 굳혀 놓고자 한다. 가족 테두리로 회귀하는 삶의 지향성으로 현대를 살아간다. 우리 사회의 뼈대이다.
기독교도 이 단단한 습속의 틀을 부수지 못하였다. 2000년 전 친족의 벽을 허물고 온갖 사회의 구획을 무너뜨렸던 초대 교회의 모습과는 다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과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을 깨고, 종과 상전의 지배 관계까지도 초대 교회는 넘어섰던 것이다. 이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우리나라 교회의 ‘변혁 능력’이 그만큼 부족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지난날 군사 정권이 부추겼던 경제 성장의 이념과 가치를 신앙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두가 경제 중심의 의식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경제 성장 그것 이상 다른 대안이란 없다는 듯 사회 전체가 휘둘리었다. 물질로 모든 것을 재고 물질의 획득으로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경제주의’가 일종의 국가 종교로 군림하던 시대였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한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식민화되었던 것이다. 물질의 부를 ‘축복’과 등식화하여 거대 성장주의를 앞장서 떠받들었다. ‘가족주의’라는 습속에 ‘경제주의’가 덮쳐 우리의 삶은 좁은 이기성의 소용돌이 속에 무참히 함몰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시민 사회라 하는 시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저 이기성의 덩어리를 벗어 던지지 못하였다. 고스란히 간직해 왔던 것이다. 그 덩어리를 시민 사회로 포장해 놓았을 따름이었다. 시민 사회란 경제 타산과 욕구를 보장해 주는 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포악한 독재 체제 밑에 억눌려 온 좁다란 이익 추구의 야만성이 그 체제를 몰아낸 빈터 위에서 활개치게 된 것이다. 자기 집안의 이익, 자기 지역의 이익, 자기 집단의 이익, 그것이 절대의 가치를 가진 듯이 제멋대로 난무한다. 그것이 곧 시민의 자유라고 믿는다. 이 절제함 없는 탐욕의 해방 공간이 우리의 시민 사회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시민은 주저함 없이 탐욕하고도 되새김질하지 않는 거친 이기주의자이다. 바로 그러한 이기주의자들의 욕구가 마구 터져 나오는 뜨거운 탐욕의 도가니가 엉뚱하게도 시민 사회라 행세한다. 이것은 이해됨직하고 또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독재의 고삐를 벗어 던진 다음 광란한 질주밖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야생마에 견준다. 그러나 시민은 시간이 만들어 주지 않으며 느닷없이 탄생하지도 않는다. 훈련되어야 할 사회 존재다. 시민은 사리에 바른 말을 하고 살펴 행동한다. 불행하게도 ‘사리 바름’은 한낱 경제 타산의 ‘이치’로 구겨져 뒤틀리고 ‘살핌’은 자기 이익을 챙기려 계략과 술책을 꾸미고 남을 농간하는 ‘전략’의 수준으로 떨어져버렸다.
시민은 자기의 이익을 탐하는 이기주의자에 맞서며 이기주의자를 넘어선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참여하고 헌신하는 책임 있는 사람이 시민이다. 좁은 삶의 테두리 그 너머 낯선 사람의 아픔에 다가서 상처를 싸매 주고 그를 보살피는 사람이 참된 뜻에서 시민이며, 그러한 품격이 깊은 뜻에서 시민다움이다. 자기의 욕구와 타산에 얽매여 그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고 피하여 옆으로 지나가는 자는 시민이 아닌 이기주의자이며,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시민 덕목’이 아닌 반시민성이다. 상처받은 사람을 보고 마음에서 울어나는 동정심 때문에 자기 일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는 실천 의식과 행동, 그것이 시민다움의 품격이다.
이 시민의 원형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수많은 사회 과학 책들이 도서관에 즐비하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벨라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값진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서슴없이 그 원형을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찾는다. 강도당한 사람의 아픔에 동정하여 그 상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참 이웃됨’의 자질이 ‘시민다움’이며, 그러한 품격을 지닌 사람이 바로 ‘참 시민’이다.
오늘날 우리가 시민 사회라 하는 것은 깊은 뜻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표상하는 시민다움을 놓치고 있다. 그러한 시민 덕목을 갖춘 시민이 없는 ‘거짓 시민 사회’이다. 시민의 탈을 쓰고 자기 이익만을 찾으려 하는 ‘가짜’ 시민이 함부로 설치고 기껏해야 자기 권리를 지키려 하는 ‘얕은’ 시민이 활개치는 마당일 따름이다.
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상처받은 사람을 피한 채 좁다란 이익의 추구를 두둔하는 것은 아닌지, 개교회주의와 개교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일체의 협소한 칸막이와 울타리를 넘어 낯선 사람의 아픔으로 다가가 그 상처를 돌봐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길러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이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박영신 목사(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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