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역사 ‘밖’의 초월적 존재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오늘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로서의 자각과 바른 자세가 필요한 때 인줄 믿는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믿는 신학적 터전 위에 세워졌고 현대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실현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교회가 역사적 존재로서 구속사 뿐 아니라 세상의 역사 상황에 대하여서도 상당한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와 교인에게 역사 의식을 환기시키며 역사에 대한 자각심을 심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이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진전되었고 현재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장차 진행에 대한 방향 감각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다. 동시에 역사 앞에 사는 자들이다. 교회는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성취해 가는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 안에서 갱신되어져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끊임없는 바른 역사의식을 통해 과거 잘못된 존재 양식과 현재의 참담한 죄성을 회개하는데서 이루어 져야할 변혁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직하게 민족과 역사 앞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엄숙한 국면에 처하여 있다.
첫째는 기독교 윤리 즉 성경적 윤리관의 확립에 대한 문제이다. 그 동안 엄청난 속도로 교회 수가 증가되었고 기독교인의 수효는 1000만이 넘는다고 한다. 목회자의 설교, 성도들의 기도, 불타는 내세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 세계 어느 기독교 교회에서도 찾기 어려운 교회생활과 예배 행위는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신앙이 추상화되거나 관념화됨으로 역사 의식의 상실과 사회의식의 유약성 때문에 민족 앞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형 사건 중심부에 크리스천이 존재한다는 슬픈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성경적 윤리의 실현과 기독교적 사회 공헌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말씀에 근거한 역사 의식이 요청된다.
둘째는 민족사적 과제인 통일에 대한 교회의 역사 의식이다. 한 민족 전체가 그렇게도 염원하며 갈망하는 막중한 통일문제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어떻게 참여하며 선지자적 임무를 다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대 북한 통일정책이나 통일방안을 연구 추진함에 상당한 갈등과 의식의 충돌을 이루고 있다. 이것 때문에 사회는 더 어수선하며 어두운 벽이 하나됨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회색 빛 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교회는 분열된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기 전에 자체 분열을 극복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화합을 누구보다 많이 말하면서 교단의 분열은 얼마이며 교파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인가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대형교회와 더불어 농어촌 작은 교회까지 교회안의 분열과 분쟁의 소리 없는 냄새는 하나님의 보좌에 올리워져야 할 향 냄새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외식의 이중틀에 고뇌만 하고 있다. 이 부끄러운 역사의식의 빈곤 문제는 결국 민족 통일을 지연하는 걸림돌이다.
셋째는 물량주의를 극복해야 할 역사의식의 확립이다. 교회는 금욕과 절제를 설교해 왔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황금만능주의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며 잘살기보다는 바르게 사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적어도 이 부분만은 큰 소리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 졌고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물량주의적 사고가 교회 안에 스며들었고 절제와 금욕의 덕목을 상실함으로 오는 예언자적 용기를 잃어버렸다.
이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이다. 한 벌 옷으로 메뚜기와 석청을 양식 삼았던 예언자 세례 요한의 제자됨의 길을 우리 모두 음미하면서 자성해야 할 때이다.
2002년은 참으로 의미있는 해이다. 세계인의 시선 앞에 살아있는 한국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분명한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 역사의 새로운 소망은 작은 소수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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