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시간은 다른 일정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금요기도회에 참석하는 아내 대신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티비 방송을 보며 자주 운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잊지 못할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자리이다. 과거에 연예인들이 그리운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프로가 있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과 감동이 있다. 가끔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옛사랑이나 추억 속의 친구를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많은 사연은 가족을 찾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졌던 부모와 자식, 한 때의 실수로 헤어졌던 형제, 누구도 막지 못할 끈끈한 핏줄 간의 만남이 눈물겹다.
가족 관계가 어쩌면 그렇게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는지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의 가족사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많이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상담심리학에서 그런 사람들을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이라고 하지 않던가?
철 덜든 자식으로 자라왔고 철없는 자식들 탓하는 부모로 살다가 마흔 고개를 문득 넘기고 보니, 가족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부모에게 상처 입었고 자식에게 많이 상처 주는 나를 발견하고는 새삼스럽게 놀라기도 한다.
기구한 사연들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드라마 같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다. 딸이 죽은 줄 알고 불가에 귀의한 어머니를 찾는 딸의 사연. 총각인 줄 알고 속아서 결혼한 후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이별을 선택했던 여인이, 간암으로 투병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고 싶은 사연. 뱃사람이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아버지인데 부모의 이혼으로 더욱 잊혀가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어버이날마다 카네이션 보고 눈물 흘리던 딸이 갑자기 찾아온 병마와 싸우면서도 병이 낫는 것보다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더 큰 소원이라는 안타까운 사연도 눈물겹다.
그렇다고 사연이 채택된 사람들이 찾는 사람을 다 만나는 것은 아니다. 찾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 못 만나고 방송에 나오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찾지 못해서 미완의 숙제로 남기고…. 만나면 눈물겹게 안심하고 만나지 못하면 가슴 아픈 눈물을 함께 흘린다.
물론 만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어머니를 찾은 딸이 감사의 메시지를 남기면서 ‘지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생각만큼은 애정이 없다’고 말했다가 점잖은 네티즌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애정이 없다니 무슨 소리인가요? 오늘 방송에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만나지도 못하고 한으로 남게 생겼는데….” 하긴 수십 년을 헤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애정이 생길 수 있겠는가, 혈육이라고 해도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을 만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미안하다. 용서해라. 고맙다”인 듯하다. 그런데 만난 사람들은 지난날의 상처를 진정으로 용서했을까?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없다면 그들의 상처는 치료된 것이 아니고 그저 미봉된 것이다. 어김없이 다가온 가정의 달에, 헤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상처 많고 갈등 깊은 가족들 간에 진정한 용서를 체험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리스도께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분명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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