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수 목사(하이패밀리사무총장)


우리 집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아이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기도로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꼭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기도하던 가운데 화를 내고 말았다. 기도하기 전부터 장난치던 쌍둥이 남매의 장난기가 그치지 않은 것이다. 기도하다 말고 몹시 화가 났다. “아니 이녀석들이 아빠가 축복기도를 해주는데 장난을 쳐?”순간적으로 화가 났고 기도하다 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도 어색하고 아이들도 어색해졌다. 그리고는 “너희들 스스로 기도하고 자!”라는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아이들의 방을 빠져나왔다. 작은 실수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방을 나와 서재에 앉아 있으려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러고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나!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나는 용서하며 사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대답은 그러지 못함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못 하시는 것이 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하나님이 못 하시는 것이 있다니!’ 이 때 교수가 말했다.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것과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할 때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수가 또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도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학생들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교수가 말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과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부부를 상담하면서 서로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자훈련을 통해 배운 것들이 자신을 치료하고 자신의 분노를 해결해준 것처럼 말한다. 자신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였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그들의 마음 밑바탕에는 분노의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용서가 어려운 것일까?
용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정의한 헨리 나우웬은 “말로는 종종 ‘용서합시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칭찬-너그러이 용서한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는 쾌감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 이기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연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용서다. 그러려면 용서가 현명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하며 실효성이 없다는 나의 모든 주장을 이겨내야 한다. 감사와 칭찬에 대한 모든 욕구를 넘어서야 한다. 끝으로, 아프고 억울한 가슴의 상처와 나와 용서의 대상사이에 약간의 조건을 둠으로써 계속 통제권을 쥐고 싶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용서는 거룩한 건망증으로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해독제로 독을 제거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한 사람은 비록 그 상처가 다시 생각날 때가 있겠지만 그 상처를 다시 소생시키지는 않는다. 용서는 나를 위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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