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부흥운동 영향권서 성장 예배 주도권 확립한 ‘한국인 조사’ 지도력 바탕으로 영남지역 발전 일궈 북장로교 열정적 교육·의료정책은 지역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 미쳐


박창식 목사는 목회일선에 있으면서도 교회사, 특히 지역의 교회사에 많은 관심과 고민을 하는 목회자다. 박 목사는 최근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던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활동과 교회형성을 연구한 내용이다. 박 목사는 이번 논문에서 기존의 교회사관인 선교사관적·민족사관적·민중사관적 교회사의 약점을 보완, 현직 목회자답게 ‘교회’를 중심에 두고 지역의 교회사를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러한 박 목사의 시도는 그동안 초기 영남지역 교회형성 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도 도외시된 ‘조사’를 중심으로 연구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또한 그동안 민족주의와 순교중심으로 다뤄진 신사참배 문제를 신학적인 접근을 조심스럽게 이 논문에서 시도한 것 역시 역사학계에 새로운 학문적 연구과제를 던진 셈이다. 여기서 박창식 목사의 논문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주>

본 연구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영남지방 선교와 교회형성에 관한 역사적인 궤적을 살피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하였다. 북장로교의 영남지방 최초의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배위량)가 1893년 대구·경북지방을 첫 순회 전도한 이후, 북장로교의 주요 선교지역이었던 이 지역의 교회 역사는 거의 연구되지 못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 전체 장로교 선교는 함경도의 캐나다장로교, 평안도와 경상북도의 북장로교, 전라도의 남장로교 그리고 부산·경남지방의 호주장로교가 각각 그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그런데 여타 지역에 관한 연구는 이미 비중있게 다뤄졌지만 유독 북한의 평안도 지방과 북장로교의 중심 선교지역이었던 영남지방만이 연구가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하여 한반도 전체의 장로교 선교역사가 제 지형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에 각 선교부별 및 지역별 역사의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본 연구의 관점은 한국교회사 연구에 나타났던 기존 사관들(백낙준의 선교사관, 민경배의 민족교회사관, 주재용의 민중교회사관)의 약점에 주목하였다. 이들 사관들은 교회사이면서도 정작 ‘교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사를 조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오히려 ‘교회’개념을 강조한 소위 ‘교회론적사관’으로 진행하였다. 선교사적사관은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시각이 강조되었다면, 토착교회사관들은 반대급부로 한국적 특수상황이나 정치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교회론적사관은 지역이나 민족적인 한계 속에서 보지 않고 세계교회의 역사와 전통,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우주적인 보편성에 근거하여 한국교회사를 읽고, 동시에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세계교회의 전통을 보는 새로운 역사이해이기 때문에 기존사관들의 약점을 극복하였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전파자인 선교사들의 시각과 수용자들인 한국인들의 노력을 균형있게 다룸으로써 영남지방 장로교회의 형성사를 살피려고 노력하였다.
본 연구는 1934년 북장로교의 한국선교 50주년 시에 3대 평가항목이었던 교회발전(church develop-ment)·교육사역(educational work)·의료사역(medical work)을 중심으로 교회형성과 발전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을 시작으로 해방 이전까지의 일제하의 영남지방 장로교회의 민족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그 연구된 결과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남지방의 선교와 교회형성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결코 세계교회사의 흐름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19세기 영미를 강타했던 부흥운동을 동력기관으로 하는 미국 개신교회의 해외선교운동 안에서 영남지방의 선교 실체가 파악된다는 의미이다. 19세기 미국 개신교 주류교단들의 왕성한 해외선교운동은 미국의 저명한 교회사학자 마크 놀이 말한 소위 ‘복음주의적 미국’이라는 바탕에서 표출된 힘이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대도시인 부산·대구·안동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치되었다. 부산 선교지부는 초창기 영남지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지만, 1913년 이후 선교구역의 조정으로 호주장로교 구역으로 이양되면서 대구·경북지방이 북장로교의 중심 선교지역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한반도 전체의 장로교회 역사 속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의 토착교회 형성과정에서 기존의 한국교회사 서술이 가졌던 맹목적인 선교시각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그동안 선교사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한국인 조사들(helpers)의 숨은 사역을 집중 부각시켰다. 1924년까지 이 지역에 활동했던 100여명의 조사들을 발굴하면서 이들을 한국교회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조사들은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업무보조자로 규정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개척과 목양의 주역들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한국인 조사들의 사역을 조명해야만 선교사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장로교회 형성사가 파악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 한국교회의 급성장의 비밀은 단순한 어떤 ‘방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탁월한 자립·자치·자전의 ‘정신’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결국 선교사들의 노력과 선교정책만이 아닌 한국인들의 태도가 중요하였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북장로교의 교육정책은 1897년 베어드가 입안한 ‘우리의 교육정책’의 채택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이것은 네비우스방법을 교육에 적용한 것이었다. 학교의 설립과 운영목적은 학생들이 사회의 지도자로 어떤 분야에서 활동하던 확고한 신념과 열정을 가진 복음전파자나 적극적인 설교자로서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데 두었다. 이런 목적 하에 부산·대구·안동과 같은 대도시에 선교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더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영남의 각 지역에 세워진 토착교회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소수 선교학교로 만족할 수 없었고 “교회 있는 곳에 학교 있다”고 할 정도로 사숙(私塾) 내지는 초등학교들을 설립하여 새로운 시대의 욕구들을 충족하였다.
1920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 각 교회들을 중심으로 70여개의 교회학교들이 보고되고 있다. 결국 선교사들의 선교학교 설립뿐 아니라 지역 교회들의 교회학교를 통하여 강력한 수용의지를 교육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학교의 출신들이 그 지역의 기독교회 설립과 발전을 주도하였던 것을 보면 교육선교가 지역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북장로교 의료정책은 영남지방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의료선교는 한국선교 일반에서 그러했듯 지역장로교회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였다. 의료선교는 본질적으로 간접전도기관이지만, 대구동산병원의 경우 지역전도에 가장 모범적인 경우였다. 동산병원은 병원전도회를 조직해 유급조사들을 고용하는 등 체계적인 전도활동을 펼친 결과, 대구·경북지방에 112개의 토착교회를 설립했다. 이것은 세계선교역사에 유례가 드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의료선교를 의료혜택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쟁기사역으로 보다 적극적인 기독교수용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후반부에는 두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첫째는, 3·1운동 당시 영남지방의 장로교회들의 활동을 연구하였다. 3·1운동 시 영남지방 장로교회들은 그 지역의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통로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가 초창기에 이미 지역에 대한 리더십을 확립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3·1운동으로 지역의 토착교회들은 외래종교 이미지를 벗고, 민족적 종교로 더욱 거듭나게 되었다고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들이 제시한 정교분리의 원칙적인 한계에 붙들리지 않고 민족과 고통을 함께하는 교회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다루었다. 지금까지 신사참배 문제는 특정지역에 치우친 역사인식으로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도외시되었던 경북지방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안동의 이원영 목사의 경우와 경북 여러 지방과 관련된 ‘시온산 제국운동’을 고찰함으로 특정지역에 치우친 역사인식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사참배에 대한 논의가 ‘민족주의적·순교형적 패러다임’에 국한되어왔는데, 이제는 신학적인 전환이 있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시도하였다.
시온산제국운동이나 당시 지역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단순한 신앙적인 차원만이 아니다. 이를 신학적인 문제로 여기고, ‘전천년설적’인 종말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구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인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본 연구의 결과로 발생하는 학문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지방 장로교회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이제 한반도 전체의 장로교회의 선교역사가 제대로 파악되었다. 셋째, 앞으로 진행될 지역 연구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넷째, 영남지방의 장로교회의 역사적·신학적인 성격을 파악함으로,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를 형성하고 또한 지역사회를 섬길 수 있는 교회상을 제시해야 할 책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박창식 목사>
총신대 신대원 82회 졸(M. Div.)
고신대 대학원 역사신학(Th. M.)
계명대 대학원 박사(Ph. D.)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외래교수(현)
대구·경북 기독교역사연구회 운영위원(현)
대구 달서교회 담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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