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칼빈주의 입장서 모든 교리 분석·비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근세사 교수였던 카(E. H. Carr, 1892-1982)의 말은 언제 들어도 명언이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책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고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에 있어서 신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세계가 인정한 4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우리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Charles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를, 그리고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의 창설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를 꼽는다.
그러면, 장로교회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에는 이들 넷에 버금가는 신학자가 없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감히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이들 네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신학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바로 윌리엄 커닝함이다.
종교개혁 이후 얼마 안가서 서구인들의 신앙 열정은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파급된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 급속히 냉각되었고, 온건하면서도 관용적인 신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소위 점잖고 신사적인 종교생활만을 강조함으로서 기독교의 고유한 구속적 속죄신앙은 퇴색해 버리고 만 것이다. 커닝함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창 생활을 끝마치던 1년 동안 그는 죄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가 직면했던 최대의 문제는 ‘어떻게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토마스 찰스머스(Thomas Chalmers)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커닝함이 토마스 목사와 절친하게 된 것은 1834년 에딘버러의 트리니티 대학 교회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커닝함은 이 교회에서 10년간 목회를 하였다. 이 기간을 커닝함의 생애에서 ‘10년 투쟁’의 기간이라고 부른다.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는 장로교회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준 국가교회(semi-state church)와 같았다. 목사를 초빙할 때 교인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의회’의 권한과 결정보다는 소위 토지귀족이었던 당회원들의 그것이 더 막강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제도는 국가 정부가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총회가 개최될 때마다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 운동을 영도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찰머스와 윌리엄 커닝함이었다. 이 싸움은 10년간 계속되다가 1843년 5월 마침내 총회에서 대분열이 일어난다. 여기서 새로운 ‘자유 스코틀랜드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목사 451명이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 산파 역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토마스 찰머스와 윌리엄 커닝함이었다. 이들은 빈손으로 나와서 길가에서 또는 들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놀랍게도 10년 이내에 새로운 교회 건물을 800개나 세우고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새 신학교’(New Collage)를 건립하였다. 1900년 자유 스코틀랜드 교회(비주류)가 다시 주류 교회와 합동할 때 이 신학교의 건물을 주류 교회에 편입시킴으로서 오늘의 에딘버러대학교 신학부 건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새로 세운 신학교에서는 토마스 찰머스, 데이빗 웰쉬, 존 던칸 그리고 윌리엄 커닝함 등 네 사람이 전임교수로 봉직하였다.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웰쉬 교수가 사망하자 커닝함은 역사 신학 교수가 되었고 또 2년 뒤에는 토마스 찰머스 학장마저 사망하자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커닝함은 12년 동안 뉴 칼리지의 학장으로서 그리고 역사신학 교수로서 그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시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역사상 가장 활발하고 왕성했던 칼빈주의 신학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따라서 윌리엄 커닝함을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교회를 대표하는 칼빈주의 신학자로 추대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것이다. 만약 19세기 말 세계 5대 칼빈주의 신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커닝함을 그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다.
과거 자유 스코틀랜드 신학 대학의 교장을 역임했던 존 맥클레오드 학장은 스코틀랜드 신학사상을 강의하면서 커닝함 교수를 가리켜 “스코틀랜드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라고 한 바 있다. 커닝함이 서거하자 뉴 칼리지의 도날드 맥클린 교수는 ‘커닝함은 스코틀랜드에서 칼빈주의적 전통을 마지막으로 서술한 인물이었다. 그가 떠난 다음 신학은 이 전통에서 떠났고 너무 많은 변화가 많은 곳에서 발생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러면 커닝함이 서술한 ‘역사신학’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일찍이 커닝함의 전기를 쓴 바 있는 로버트 레이니(Robert Rainy) 교수는 커닝함의 역사 신학 연구 방법을 세 가지로 지적했다. 곧 역사신학은 첫째, 사도 시대부터 커닝함이 살고 있던 시대까지 기독교 신자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주장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며, 둘째, 교회(교단)가 가지고 있는 교리의 기원과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신학적인 경향들을 밝히고, 교리를 배양한 토양과 여기서 맺어진 열매와 신학에 본래부터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작용하였는가를 고찰하여 서술하는 것이며, 셋째, 교리의 생성과 열매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조직신학에 존속시킴으로서 적용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커닝함의 역사신학은 교리사이며 그가 서술한 다른 역사서들도 교리사적 교회사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커닝함 교수의 저서가 우리에게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박사가 ‘파수군’ 지에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을 소개하면서 주로 커닝함의 저서를 인용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커닝함 교수의 ‘역사 신학’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장점으로서 첫째, 이 책은 철저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교리들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개혁신학의 모든 발전을 한 눈으로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개혁신학이라고 하더라도 개혁신학 상호간에 유사점과 차이점을 제시하면서 어떤 것이 보다 성경적인지를 커닝함 교수는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셋째, 역자도 지적하듯이 커닝함의 역사신학은 처음부터 일관성이 있고 일목요연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단점으로 중세 스콜라 사상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지나치게 장로주의적 저서라는 것과 셋째는 문장이 너무 길어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닝함의 ‘역사신학’은 영국과 미국의 정통 신학계에 있어서 불굴의 명작이요 고전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회의 역사에서 한 가지 기억하고 새겨보아야 할 사건을 말하며 글을 맺는다. 뉴 칼리지 학장 시절 윌리엄 커닝함이 프린스턴의 찰스 하지를 만나러 대서양을 건넜었다는 사실이다.
글=홍치모 총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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