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기쉬운 대중적 언어 사용…주기도 본래 정신과 일치 능동·수동태 혼돈, 일관성 유지 미흡…추상명사 ‘악’ 사용 아쉬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기도·사도신경 전문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기도·사도신경 연구특별위원회가 2004년 12월 3일 주기도와 사도신경 새 번역안을 한국 교회에 내놓았다. 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신약학)가 ‘주기도’ 새 번역안에 대한 의견을 보내왔다. 한국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 두 가지 새 번역안에 관심을 가지고 열린 논의를 하며 합의를 모아나가길 바라며 최 교수의 의견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좋은 번역…그러나 한두 가지 아쉬움도
지난 12월 6일자 주요 일간지와 여러 교계 신문에 120년 만에 새롭게 번역된 개신교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소개되었다. 이번에 소개된 새 번역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두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지만, 금년 가을에 개최될 각 교단 총회에서 인준을 받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그리고 두 번역문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신학계나 교계 언론에서도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새 주기도문 번역문의 장단점만 간단히 고찰해보고자 한다.

<‘주기도’ 새 번역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좋은 점
첫째, 적절한 원문선택이다. 새 주기도문 번역문은 연합성서공회(UBS)가 출판한 제3판 헬라어성경의 마태복음 6장 9-12절의 주기도문 본문을 원문으로 선택했다. 연합성서공회의 제3판 헬라어성경본문은 네슬-알란트 26판 헬라어성경본문과 동일한 본문이며, 세계 신약 학계에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헬라어 원문 선택은 매우 적절하다.
둘째, 적절한 본문 선택이다. 신약성경에는 두 종류의 주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마태복음 6장 9-12절의 긴 본문이며, 또 하나는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짧은 본문이다. 이 두 주기도문 본문 중 어느 본문이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본문인가에 관하여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짧을수록 원본에 더 가깝다’는 논리 아래, 누가복음의 짧은 본문을 원래의 주기도문 본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2세기 초엽의 기록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문집, ‘디다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공적인 주기도문 본문은 누가의 짧은 본문이 아닌 마태의 긴 본문이었다. 따라서 마태의 긴 주기도문 본문을 교회의 공적인 주기도문 본문으로 선택한 것도 올바른 선택이라고 판단된다.
셋째, 원문에 충실하다. 새 주기도문 번역의 특징은 그 어떤 우리말 주기도문 본문보다도 원문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금번의 새 주기도문은 개역판 개정역은 말할 것도 없고 표준새번역 개정판에 수록된 주기도문 본문보다도 원문의 의미를 더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기존의 주기도문 본문은 주기도문 전반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세 가지 청원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헬라어 ‘슈’(당신의)의 번역을 계속 생략했으나 새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모두 살려 ‘슈’의 내용인 ‘아버지의’를 첨부하였다. 기존의 첫 번째 청원의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로 번역한 것도 원문의 의미를 바르게 살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알기 쉬운 현대어 번역이다. 새 주기도문 번역문을 보면 젊은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여러 고어체를 누구나 알기 쉬운 현대어로 바꾸었다. 이미 고어체 주기도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새 주기도문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주기도문을 통용되는 구어체로 바꾸는 것은 주기도문의 본래 정신과도 일치한다. 사실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주실 때 당시 종교적인 언어인 히브리가 아닌, 누구든지 알기 쉬운 구어체인 아람어로 주셨다는 것과, 그것이 마태복음에 수록될 때도 고전적인 헬라어 문체가 아닌 대중적인 헬라어 코이네문체로 수록된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주기도문을 누구나 알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로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적절한 어휘선택이다. 새 주기도문 번역문을 보면, 기존의 ‘오늘날’을 ‘오늘’로 바꾸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으로 번역하고, 별다른 의미도 없이 송영 앞에 붙여졌던 ‘대게’를 생략하고, ‘권세’를 ‘권능’으로,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를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로 바꾸었다. 이것은 원문에 보다 충실한 올바른 어휘선택이라고 보아진다.
여섯째, 적절한 문학적 배열이다. 새 번역 주기도문은 헬라어 성경본문의 배열을 따라 서원, 아버지에 대한 3가지 청원, 우리에 대한 3가지 청원, 송영 시적인 기도문으로 배열하였는데, 이것은 주기도문의 구조파악이나 해석은 물론 암기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아쉬운 점
모든 번역이 완벽할 수 없는 것처럼,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인지 모르지만, 새 주기도문 번역문도 옥에 티처럼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일관성의 결여이다. 새 주기도문 번역문을 보면, 첫 번째 청원의 동사를 능동태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로 번역하였다. 원문의 본래 동사는 능동태가 아니고 수동태이다. 하지만 이 수동태는 히브리문학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기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신적수동태이다. 따라서 동사형태는 수동태이지만 내용은 오히려 능동태이기 때문에 첫 번째 청원의 동사는 적절하게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첫 번째 청원의 수동태 동사를 능동태로 번역하였다면, 세 번째 청원의 동사도 수동태 형태인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가 아닌 능동태인 ‘땅에서도 이루게 하소서’라고 번역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세 번째 청원의 동사도 첫 번째 청원의 동사와 똑같은 신적수동태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지막 청원에서 기존의 주기도문처럼 ‘악’이란 추상명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 헬라어 원문에 ‘악’을 지칭하는 관사 ‘투’는 중성명사로 볼 수도 있고, 남성명사로도 볼 수 있다. 중성명사로 볼 경우에는 ‘악’으로 번역되고, 남성명사로 볼 경우에는 ‘악한 자’로 번역된다. 이 문제는 이미 교부시절부터 논란이 되어, 어떤 교부들은 ‘악’으로 번역되어야 하고, 어떤 교부들은 ‘악한 자’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악’보다 ‘악한 자’를 선호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영어성경인 엔아이브이(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와 엔알에스브이(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는 다같이 ‘악한 자’(the evil one)를 채택하고 있다. 필자는 후자의 선택이 주기도문의 본문과 주기도문이 수록된 성경의 용법과 나아가서 주기도문이 처음 사용된 초대교회의 상황에도 부합된다고 본다. 즉 여섯 번째 청원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시험’이 추상적인 시험이 아니고, 사탄 혹은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을 뜻하고 있다면, 사실상 전반부의 의미를 부정형을 통해 반복하고 있는 후반부의 경우에도 추상적인 ‘악’이 아닌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마귀나 사탄을 지칭하는 ‘악한 자’로 보는 것이 옳다. 신약성경에서 주기도문과 동일한 단어의 용법을 보면 추상적인 ‘악’이 아닌 ‘악한 자’나 사탄으로 번역되고 있다(마 13:19,39; 막 4:15; 눅 8:12; 요 17:15; 요 1서 5:18; 엡 6:16; 살후 3:3)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의 경향은 가능한 한 사탄을 비인격화시켜 ‘악’이란 말을 선호하고 있다할지라도, 복음서와 그 밖의 서신들은 오히려 사탄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대적하는 인격체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시험을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이해하였고,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등 복음을 대적하고 신자들을 핍박하는 자를 사탄의 세력이나 적그리스도로 이해한 점을 고려한다면,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에 나오는 ‘악’을 추상적인 악이 아닌 ‘악한 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초창기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 마지막 청원을 통하여, 예수님이 모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했던 것처럼, 저들도 여하한 사탄의 위협과 공격 아래에서도 배교나 불신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곡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아쉬운 지적이 새 주기도문 번역문이 가진 더 많은 장점을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이 두 가지 지적을 확대해석하여 마치 새 주기도문 번역문이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지적은 의미상의 문제가 아니며, 두 번째 지적은 선택이나 선호의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금번의 새 주기도문 번역문이 내년도 각 교단 총회에 상정되기 전에 전문위원들이 다시 한번 의견을 수렴하여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왜냐하면 새 주기도문 번역문은 적어도 다음 한 세기동안 한국 교회가 사용하여야 할 우리 모두의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제안 글=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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