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대한 성경 가르침 이해 우선… 제도적 보완 전제한 논쟁은 필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논의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또 한 편의 글을 소개한다. 앞선 글(6월 9일 16면)에서 이상원 교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군복무에 상응하는 다른 임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첨예한 군사대립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폈다. 이번 글에서 최현범 목사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우리의 신앙에 전혀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반문한다. <편집자 주>

오늘날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교회와 신학계 역시 갑자기 떠오른 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별히 교회가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주체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병역거부나 수혈거부로 인해서 반사회적으로 비춰졌던 종교집단이 한 지방법원의 판결을 계기로 사회 일각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고 우려할 만한 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판결이 결국은 특정 종교집단에게 특혜를 부여하게 되므로 이런 흐름을 막기 위해서라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성경적인, 신학적인 근거를 내세워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신앙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 안에서 전혀 용납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종교집단에 의해서 병역거부가 제기됨으로, 문제의 본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 되어 온 양심적 병역거부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이 내세우는 병역거부의 이유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우리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왜 이러한 것들이 여러 나라에서 논의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는 가운데 반대하는 것과, 그러한 것에 대한 이해 없이 반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몇 가지 관점을 갖고 서구에서 일어난 양심적 병역거부의 배경을 다루어 우리 모두의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
먼저 병역거부의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신앙 속에서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갖고 전쟁의 부당성을 말함으로, 근본적으로 개인의 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윤리를 교회가 국가에 그대로 요구할 경우, 전쟁거부는 물론이거니와 형벌의 집행 등 수많은 문제에서 모순을 야기 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윤리는 개인윤리와는 구별된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전쟁을 결코 배타시하지 않고, 죄악시하지도 않는다. 아직 죄가 관영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악을 막아 국민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고, 그 결과 우리로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이웃 나라가 쳐들어온다면 국가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또 함께 공동의 이해관계 속에서 방어조약을 맺고 있는 이웃 나라가 불의한 공격을 당한다면 군대를 보내어서 그 나라를 외침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사회윤리, 국가 윤리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산상수훈의 교훈이 사회윤리와는 분리되어서 전혀 무관한 것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살인을 금하신 주님은 이미 구약의 율법 속에서 무고한 살인에 대한 중한 형벌을 통해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주셨다. 더구나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과 살상에 대한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은 국가나 사회윤리 속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투영되어져야하며, 국가는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펴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예언자의 자세로, 정치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전쟁과 교회의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와 교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관계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초대교회나 초기 교부시대의 경우 국가로부터 핍박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교회는 철저히 평화를 지향했고, 전쟁과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터툴리안의 경우 그리스도인의 군대복무를 거절하도록 가르쳤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군인은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에는 합당치 않은 직업이었고,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위배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당시 성도들은 대체로 직업군인이 되는 것을 기피했다. 병역이나 전쟁참가를 거부해서 형벌을 받는 자는 도리어 순교자와 같이 존경받기도 했다.
그러나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가 국교로 됨으로 인해서 교회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교회는 국가에 대한 책임을 끌어안아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국가의 안위는 자연히 교회의 안위와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점차로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을 따라 악을 징벌하는 전쟁수행을 합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역과 전쟁의 거부는, 국가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아주 커다란 책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어거스틴에 와서 신학적으로 강화되었다. 게르만 족의 침입을 받는 당시의 로마의 상황 속에서 어거스틴은 전쟁을 불의한 전쟁과 의로운 전쟁으로 구분하면서 이들과의 전쟁을 ‘의로운 전쟁’(bellum iustum)으로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의로운 전쟁론은 루터와 칼빈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유럽의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에는 어거스틴을 앞세워서 의로운 전쟁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가 국가에 대해서 일으킨 전쟁 중에 정당하고 의로운 전쟁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킬 당시 국가 지도자들은 누구나 다 전쟁의 당위성을 말했고,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나 신학자를 동원하여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로운 전쟁이라고 강변하였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전쟁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어느 광기 있는 독재자의 이데올로기나 야심이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어느 한 민족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간의 전쟁에서 절대복종의 명령 체계 속에 있는 군인들은 무조건 나아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야 했다.
근대 병역에 대한 거부운동은 이미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있었지만,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 이 운동이 유달리 강하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속에서 이들이 누구보다도 극심한 혼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부름과 명령을 받고 입대하여 전선으로 달려가서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서 싸웠는데, 전쟁 후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인류와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들이 유럽전역에서 저지른 만행이 전시되어 두고두고 후대에게 보여 졌다. 더욱이 교회는 정치인에 의해서 계획되고 주도되는 전쟁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서 왔고, 군목들은 출정하는 군인들을 위해서 예배드리며 기도와 축도를 아끼지 않았는데, 패전 이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의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2차대전 이후 냉전 구조에서 독일 내에 재무장이 진행되고 나아가 핵무기 배치로 인해서 또 다시 전쟁의 위기가 고조 될 때, 양심적인 병역거부자들이 일어났다. 다시 총을 들고 그릇된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마가톨릭과는 달리 독일개신교회(EKD)는 일찌감치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입법화에 입김을 넣었다. 많은 논란과 진통이 있었으나 1956년 병역법 속에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법이 통과되었고, 그 이후로 이러한 자들은 일반 병역의무자보다 좀 더 길게 일종의 시민봉사자로 근무를 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사적인, 현대사적인 논의 외에 우리의 심정적인 현상을 생각해보고 싶다. 역사적인 가정을 한번 해 보자. 만약에 과거 일제시대에 어떤 일본청년이 식민지에서의 군인들의 횡포를 반대하면서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했다고 한다면 그 젊은이의 행위를 회고하는 우리 국민의 시각은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얼마 전 이스라엘의 군인 일부가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명령을 거부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 특히 약한 자들을 동정하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명령을 거부한 이 군인들에 대해서 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심정적으로 동조하였을 것이다. 나치 군대에 가는 것에 대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독일인이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비판보다는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었을 것이다. 이 말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일방적인 반대는 우리 자신의 자연스런 심정에서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의 일원으로 국방에 대한 의무를 이행함은 당연한 신앙적 행위이나,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킬 때, 국가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해야하는 것 역시 중요한 신앙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병역의 의무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절대화시키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는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를 면밀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고 전쟁의 위협이 높아 군대의 기강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충분한 여건조성이 없이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제도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더구나 아직 우리의 군대생활이 서구에 비해서 훨씬 힘들고 비합리적인 부분이 많아, 일부 젊은이들이 군 생활을 기피하려고 하는 현실에서, 섣부른 허용은 자칫 양심과는 관계없는 편의주의적인 사고를 부채질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한 제도적인 보완점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는 사회 속에서나, 교회 안에서 보다 전향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또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시 서구열강이나 일본과 같이 불의한 전쟁의 실수를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가운데, 사회 한 구석에 전쟁을 거절하려고 하는 자들이 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과히 비성경적인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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