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삼일교회)


우리 교회에는 중국 유학생 출신이 많다. 그래서 놀아도 “중국적”으로 논다. 한 번은 한자 조어를 가지고 뜻을 맞추는 퀴즈를 냈다. ‘우물 정’(井) 가운데 ‘점’ 하나를 찍으면 무슨 글자냐는 질문에 ‘퐁당 퐁’이라고 대답하는 식의 문제이다. ‘입 구(口) 속에 사내 남(男), 계집 녀(女)가 들어간 글자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했다. 감은 오는데, 쉽게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글자가 “뻔할 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이 있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뻔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다른 존재가 아닌가? 성도의 특징은 구별됨이라고 하지 않는가? 뻔하다는 소리에 성도가 가볍게 웃을 수만 있는가? 사람들은 고난받으면, 좌절하고 원망한다. 그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나 행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달랐다. 빌립보감옥에서 울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과 기도를 통해 감옥의 자리를 예배와 영광의 자리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어떤 그리스도인 공무원이 좋은 자리(?)에 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가면, 1년에 집이 한 채 생기는 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10년이 되어도 집이 안생겼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지만, 몇 년이 지나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뻔하지 않은 인생을 산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게 만만하게 보이며 사는가? 왜 뻔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가?
우리 교회는 젊은이들이 많다. 젊은이들은 밤문화에 강하기 때문에 새벽은 약하다고 한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지금은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새벽을 깨운다. 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피곤해서 철야기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금요일 저녁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회를 한다. 그런데 앉을 자리가 없어서 영상으로 연결시켜 예배 드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주일 저녁에는 사람들이 쉬고 싶어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예배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지금은 2500명이 넘는 성도가 모여든다. 전체 예배 중에 저녁예배의 참여 수가 가장 많다. 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욕은 “뻔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뻔하다”는 말을 듣는 존재가 아니라 “다르다”는 말을 듣는 존재이다. 뻔하게 살지 말자. 다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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