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종이에 새 생명 불어넣는 ‘러블리페이퍼’
업사이클링으로 노인 빈곤 해결 앞장

부활절을 앞두고 묵상하던 중 문득 7년 전 만났던 한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죽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망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던 한 기업의 대표. 그 황당한 소원을 이뤘을지 궁금해 전화했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아직 망할 능력이 부족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당황스러운 답변이 돌아온다. 과연 어떻게 된 사연일까? 없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 ‘러블리페이퍼’로 들어가보자.<편집자 주>

오랜만에 다시 찾은 러블리페이퍼의 겉은 오히려 규모가 커진 모습이었다. 공간의 크기는 물론, 공동대표 둘 뿐이던 사무실에서 지금은 여러 직원들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망하려는 회사로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직원 대부분이 한눈에도 70세는 훌쩍 넘은 어르신들이라는 것이었다.

러블리페이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랑스러운(Lovely) 종이라고 해석하기 쉽지만, 영문 표기(LOVERE:PAPER)를 보면 기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러블리페이퍼는 누군가 쓰고 버린 종이에 새로운 가치를 더함으로써 제품으로 다시 생산해 이익을 얻는 업사이클(Up-cycle) 기업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자원순환에 이바지하는 친환경 기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러블리페이퍼의 주된 관심은 따로 있다. 주재료인 종이를 공급하는 폐지 수거 어르신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러블리페이퍼는 이를 위해 시세(1kg에 50원)보다 6배가량 높은 가격(1kg에 300원)에 어르신들로부터 폐지를 매입하고 있다. 기업이라면 제작 단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는 오히려 어르신들에게 더 비싼 값에 사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여전히 어르신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가 처음으로 실시한 ‘2023 폐지수집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평균 연령 76세의 폐지 수거 어르신들이 하루 평균 5.4시간씩 주 6일을 일해 손에 쥐는 돈은 월 15만9000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1226원(2024년 최저임금은 9860원)에 불과하다.

러블리페이퍼가 이처럼 주변 고물상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값에 폐지를 매입할 수 있는 이유는 폐지 업사이클을 통해 캔버스로 만들고, 여기에 350여 재능기부 작가들의 그림을 담아 작품으로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는 덕분이다. 캔버스를 만드는 일에는 어르신들을 고용함으로써 일자리도 만들어 냈다. 현재 여섯 명의 정규직 시니어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학교와 기업, 병원 등의 단체 급식소에서 버려지는 종이 쌀 포대와 호텔에서 버려지는 폐 린넨을 재료로 만든 종이가죽 원단으로 에코백이나 노트북 파우치, 돗자리 등을 제작·판매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원단 제조 역시 어르신들이 담당한다.

10년 넘게 폐지 수거 어르신들의 환경 개선을 위해 힘써온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위 사진)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의 바뀐 표정(아래 사진)에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와 동력을 발견한다. 어르신들에게 비싸게 매입한 폐지는 이제 직원으로 함께하는 어르신들의 손을 거쳐 제품과 작품으로 재탄생한다./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10년 넘게 폐지 수거 어르신들의 환경 개선을 위해 힘써온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위 사진)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의 바뀐 표정(아래 사진)에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와 동력을 발견한다. 어르신들에게 비싸게 매입한 폐지는 이제 직원으로 함께하는 어르신들의 손을 거쳐 제품과 작품으로 재탄생한다./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김유진 부대표가 러블리페이퍼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영수 어르신을 만나 안부를 묻고 있다.
김유진 부대표가 러블리페이퍼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영수 어르신을 만나 안부를 묻고 있다.

6년 차 직원인 86세 정순자 어르신은 오늘도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설렙니다. 여기서 다른 할머니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게 즐겁죠.” 2019년 여름 인천 부평역 인근 골목길에서 손수레에 폐박스를 쌓고 있던 그에게 기 대표가 다가가 “덕분에 동네가 깨끗해졌네요”라고 인사를 건넨 게 인연이 돼 이제는 세계 최고의 종이가죽 장인이 됐다.

기우진 대표가 폐지 수거 어르신들에게 관심을 두게 된 건 10여 년 전부터다. 기독대안학교 교사였던 그는 출근길 우연히 폐지를 허리에 묶고 머리에 인 채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르는 한 어르신을 마주하고,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그 후로도 거리에 폐지 수거 어르신을 보면 마음이 쓰여 몇 번의 사진을 더 찍었는데, 어느 날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사진만 찍는 자기 모습이 비겁해 보였고 이제는 행동으로 옮기자고 결심한 게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과 종이나눔운동본부를 창립, 다 푼 참고서 등 주변에서 버려지는 폐지 등을 기부받아 고물상에 판매한 수익금으로 폐지 수거 어르신들의 생활 및 안전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했다. 첫 스텝인 종이나눔운동본부가 사회적 모델이었다면, 다음 스텝인 러블리페이퍼는 경제적 모델이었다. 만약 폐지 수거 어르신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였으면 일정 부분 돕고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을 테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해결할 수 있는 체계와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른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제 러블리페이퍼는 세 번째 스텝을 준비 중이다. 사회적기업으로 영리법인인 러블리페이퍼를 비영리법인으로 전환하려는 것. 폐지 수거 어르신의 빈곤 문제를 더 폭넓고 더 깊게 총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다. 앞선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들의 수는 약 4만2000명에 달하는 것이 현실이다. 본질적 해결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10년 넘게 이 문제를 붙잡고 싸워온 기 대표가 내린 결론이다.

“2013년부터 세 가지 끝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하나는 NGO를 만들어서 어르신들을 지원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사회적기업을 통해서 어르신 개인의 소득이라든지 일자리, 관계 등을 더 깊게 지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원하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게 완성되면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처럼 다 이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보고 ‘망해도 된다’라고 한 거예요. 러블리페이퍼가 망하는 게 폐지 수거 어르신들이 사는 거니까.”

러블리페이퍼는 폐지 수거 어르신들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아닌 환경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자원재생활동가’로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최근 조깅을 하면서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행위인 ‘플로깅’(plogging)이 환경을 지키는 작은 실천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데, 더 많은 양을 더 자주, 더 전문적으로 수거하는 폐지 수거 활동 역시 현대적 환경운동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폐지를 줍는 이들이 노인이기에 지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이 펼치는 활동을 사회, 경제, 환경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어르신 한 분이 1년 동안 수집하는 폐지가 9톤쯤 됩니다. 소나무 80그루에 해당하는 양이죠. 우리나라가 연간 폐지 재활용률이 전 세계 1위라고 하는데, 폐지 수거 어르신들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버려지고 찢긴 종이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환경과 어르신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러블리페이퍼를 통해 다시 문득 버려지고 찢겨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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