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교사들과 그 뒤 좇아 평생 복음 바치고 한 묘역 나란히 잠든 이들
희생과 헌신의 삶으로 135년 동안 생명 씨앗 뿌리며 신앙의 옥토 일궈내

십자가를 품은 심장의 형상으로 건축된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십자가를 품은 심장의 형상으로 건축된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창원서 만나는 데이비스, 맥피 그리고 주기철과 손양원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 누나인 메리와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호주인 선교사였다. 자신의 첫 번째 선교지였던 인도에서 풍토병 때문에 1년 만에 사역을 접어야 했던 그는 한국에서만큼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 5개월 동안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후, 부산으로 돌아오는 수단을 데이비스는 뜻밖에 도보로 택했다. 어쩌면 평생 섬기게 될 한국의 산하를 자신의 눈 속에 가득 담아두며, 방방곡곡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출발해 300km 남짓한 여정을 걷는 데는 꼬박 20일이 걸렸다.

하지만 부산에 도착할 즈음, 그의 몸은 이미 심하게 상해있었다. 매일이 강행군이었던 데다, 잠자리마저 좋지 않았던 탓에 천연두에 감염되고 만 것이다. 고열에 시달리는 그를 다른 선교사들이 밤새 돌봤으나, 데이비스는 결국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겨우 34세의 나이였다.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선교사 127명의 면면을 소개하는 공간.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선교사 127명의 면면을 소개하는 공간.

너무도 허망한 그의 죽음은 개인의 실패이자, 어쩌면 호주 교회의 실패 사례로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데이비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호주장로교회는 벨리 멘지스 등 세 명의 여성과 제임스 맥케이 부부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를 잇따라 한국에 파송했다. 이로부터 무려 127명이나 되는 호주인 선교사들이 차례로 내한해, 부산 경남일대를 무대로 복음사역을 펼쳤다.

선교사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1892년 부산을 시작으로 진주(1902년) 마산(1911년) 통영(1913년) 거창(1913년) 등 총 다섯 지역에 순차적으로 선교부를 세우고, 이를 거점 삼아 복음의 지경을 크게 넓혀 나갔다.

호주장로교선교사들의 빛나는 영성과 업적을 보여주는 기념관 내부. 

수많은 교회들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교육과 의료 사업에도 매진해 이 땅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신분차별이 엄연했던 시대에 백정동석예배를 강행해 우리 사회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스스로 팔을 걷어 부치기도 했다. 그들 덕분에 부산과 경남 전역이 점점 살만한 동네로 변해갔다.

아이다 맥피는 1911년 미혼의 몸으로 한국에 찾아온 여성 선교사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이 땅의 선교와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특히 남녀차별이 만연했던 시대, 여성교육에 앞장서 눈부신 열매들을 거뒀다.

1913년 4월 5일 마산에 의신여학교를 세워, 20년 동안 교장을 지내며 수많은 여성을 이 땅의 인재들로 키워냈다. 사람들은 그를 ‘미희교장’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맥피는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이 땅에 묻혔다.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선교사 127명의 면면을 소개하는 공간.
한국에서 사역한 호주선교사 127명의 면면을 소개하는 공간.

그가 별세할 때는 태평양전쟁 준비로 잔뜩 달아오른 일제가 이 땅에서 서양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박시영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정책 등에 유난히 강하게 저항하던 호주의 선교사들은 투옥까지 당하다 결국 1942년 전원 추방당하고 말았다”고 위기의 시절을 설명한다.

선교사들이 애써 세운 교회 학교 병원들도 상당수 문을 닫는 와중에 맥피의 존재는 서서히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그의 무덤은 어느 야산에 방치된 채 오래도록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호주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은 다시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련한 맥피를, 그의 동료인 호주선교사들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을 결성해 호주선교사들의 정신을 물려 받아 실천하고 있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맥피의 무덤을 찾아내 기어이 지켜냈다.

사실 이 땅에서 신앙과 사역을 계승한 한국인들이야말로 호주선교사들의 가장 큰 보람이자 소망이었다. 주기철 손양원 박성애 한상동 등 한국교회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호주선교사들의 영성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자라났다.

비록 주기철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손양원 목사는 6·25전쟁 중에 각각 순교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오히려 그 희생이 조국 교회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엄청난 부흥의 시대를 다음세대들에게 열어주기도 했다. 오늘날 그 후예들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또 다른 이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고 있다.

2009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는 3000평의 묘역이 조성되었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앞장서고, (재)창원공원 회장인 신성용 집사(수영로교회)가 거액의 재산을 희사해 조성된 이 묘역에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다 함께 잠들어있다.

이 땅에 묻힌 호주선교사 8명과 주기철 손양원 등 한국인 순교자들이 함께 잠든 창원 선교사묘역.
이 땅에 묻힌 호주선교사 8명과 주기철 손양원 등 한국인 순교자들이 함께 잠든 창원 선교사묘역.

‘선교사묘역’이라 이름 붙인 공간에는 데이비스와 맥피를 비롯해 이 땅에서 생을 마친 여덟 명의 호주선교사들이 맨 앞을 차지하고, 그 주위를 주기철 손양원 이현속 최상림 서성희 조용석 등 부산, 경남 출신의 한국인 순교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다시 그 뒤에는 해외에서 사역하다 삶을 마친 한국인 선교사 12명의 묘소가, 가장 안쪽에는 2년 전 별세한 수영로교회 정필도 원로목사의 묘소가 자리했다.

살아간 시대는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일생에 걸쳐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분투한 복음의 동역자들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모두 무덤에서 함께 일어나 한목소리로 찬양할 부활의 주인공들이다.

그 고귀한 이들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은 묘역 바로 곁에 자리한다. 십자가를 품은 심장을 형상화한 모습의 기념관과 닮은꼴로 제작된 각 묘소의 비석은 마치 서로를 마주보며 호응하는 듯 보인다.

선교사묘역과 함께 창원시성지순례길을 이루는 진해 주기철목사기념관.
선교사묘역과 함께 창원시성지순례길을 이루는 진해 주기철목사기념관.

5년째 이 기념관에서 근무하는 권인현 문화해설사는 “머나먼 호주 땅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생명을 바쳐가며 많은 일을 한 선교사들의 생애와 업적을 대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창원시는 이 묘역에 진해의 웅천교회와 주기철기념관, 마산의 문창교회와 십자바위, 함안의 손양원 목사 생가와 기념관 등을 연결한 성지순례길을 조성했다.

한국교회사의 진수를 알고 싶다면 창원으로 찾아가 보자. 순례길을 따라 걸으며 부산, 경남을 신앙의 옥토로 일구어 낸 이들의 영성을 배우고, 그들이 확신해 마지않았던 부활신앙을 회복하자.

함안 손양원목사 생가.
함안 손양원목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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