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아빠 아버지께 순복의 기도를 올립시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신학을 ‘인식론적 신학’과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이해가 쉽고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오성을 초월하는 문제가 생기면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나?’ 등의 문제를 이성과 경험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주권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모든 것을 실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 신학’은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고 모든 것을 섭리하고 통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주권 신학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우리의 기도와 그 안에 담긴 간구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신학’의 모델이 되는 기도가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유명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 서쪽 언덕에 위치한 작은 동산입니다. 예수님은 평상시 이곳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기 전 감람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십니다. 이때는 12제자를 다 데려가지 않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33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심리상태가 편치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주님은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34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해 죽게 됐다고 하십니다. 죽을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라고 합니다. ‘이때가’는 시간적인 의미보다 ‘죽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한 것’은 죽음이 지나가기를 구한 것입니다.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36절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을 호칭하는데 뭐라고 하나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앞두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계속해서 ‘아바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였습니다.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낀 겁니다. 그러니 그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친밀한 보살핌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엄한 분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포근함이 있습니다. 강과 약이 다 있습니다. 신명기 1장 31절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아버지처럼 안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실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신명기 1장 32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에게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는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내 뜻이 아니라 아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아들로서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실로 놀라운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합니다. 의지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맡깁니다. 한 마디로 아빠 아버지께 순복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순종으로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장 7~8절에서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래서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주권 신학’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우리의 기도와 그 안에 담긴 간구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순복의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순복의 기도’가 어려울까요? 나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나의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최근 신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라 코클리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코클리가 지은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 허름하고 비틀어진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생명의 원천이신 분께 돌려드림으로써 기도합니다. 산만하여 진흙탕과도 같은 일상 가운데 안식함으로써, 얽히고설킨 욕망을 하나님께 고요히 넘겨드림으로써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세상에 대한 나의 욕망을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기를 멈추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욕망 속에 있는 죄성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변화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할 때 주로 욕망으로 기도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이런 기도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는 말씀은 욕망으로 하는 기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욕망이 없는 기도를 할 수가 있을까? 이 기도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구를 위한 간구를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 마음이 정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갈망할 수 있도록 마음을 만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대부분이 성숙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하면 어떨까요? “하나님, 제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의 욕망마저 하나님의 뜻 앞에 순복하게 하옵소서. 저의 욕망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을 앞두고 이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욕망을 아버지에 대한 갈망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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