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목사(신일교회)

헌신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 14:3)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오늘 본문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2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꾀합니다. 3~9절에 등장하는 한 여인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10~11절에는 제자 가룟 유다가 나오는데 예수님을 팔려고 거래하면서 배신을 합니다. 마가는 샌드위치 구조를 좋아하는데 한 여인의 헌신을 중앙에 두고 앞뒤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배신과 가룟 유다의 배신을 두면서 헌신과 배신을 흥미롭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인과 가룟 유다를 비교해 봅시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인이나 가룟 유다 두 사람 모두 헌신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이 여인이 가져온 나드는 본래 히말라야산맥 3000미터 고지대에 사는 마타리나과에 속한 다년초 식물의 뿌리를 증류해서 다른 기름과 섞어 만든 향유였어요. 이것을 옥합에 넣어 밀봉해 수출했어요. 굉장히 비싼 향유입니다. 가격이 300데나리온이었어요.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니 10만원으로 환산하면 3000만원 가치의 향유였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인만 헌신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룟 유다도 헌신했어요. ‘아니 가륫 유다가 무슨 헌신을 했나?’하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택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한 마을인 ‘그리욧’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리욧 출신의 유다”라는 의미로 “가룟 유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유다도 가족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들 중 한 명으로 선택했을 때, 그는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게 헌신이지요. 가룟 유다도 헌신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합니다. 여기 ‘넘겨주다’라는 단어는 ‘배신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과 가롯유다가 너무 대조적임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헌신합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배신합니다. 헌신(獻身)은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배신(背信)은 ‘신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헌신과 배신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한 사람의 헌신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반면 한 사람의 배신은 예수님을 죽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진정한 헌신은 예수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헌신에 주변 사람들이 화를 내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좋다’는 말은 ‘마음에 드는’ ‘사랑스런’의 의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헌신을 합니다. 이어서 8절에서 예수님은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힘을 다하여 헌신했다는 말입니다. 스타인은 “그 여자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예수에게만 관심을 가졌다”라고 주석했어요. 헌신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헌신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게 헌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헌신이 아닐 수도 있어요.

반면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어요. 요한복음 12장 6절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셈에 빨랐어요.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팽팽 돌아갑니다. 돈에 관심이 많았어요.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들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가룟 유다는 자신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통치를 전복하고 유대 왕국을 세우는 데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알아채자 실망한 유다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다는 자기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어요. 자기의 뜻에 맞지 않자 예수님을 팝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위한 헌신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동기가 내가 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돼야 합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자아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리는 것도 헌신입니다. 시간을 드리는 것도 헌신입니다. 내 인생을 드리는 것도 헌신입니다. 그런데 자아를 드리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 아닐까요? 나의 자존심, 나의 감정, 나의 자랑 그리고 나의 꿈마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진정한 헌신 속에는 복음의 정신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헌신의 향유와 배신의 장미’입니다. 헌신의 향유와 배신의 장미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향기가 좋습니다. 향수는 향기가 납니다. 장미 또한 여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꽃입니다. 그런데 둘의 차이점이 뭘까요?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여인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향유를 드린 여인의 헌신은 결국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게 됩니다.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는 것은 여인의 행위 속에 복음이 다 포함됐다는 말입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부은 헌신에는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다 포함됐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바로 예수님의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것이라는 암시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내어주지만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아마 우리 중에 예수님을 넘겨주는 배신을 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헌신하나’라고 질문해보세요. 헌신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대로’여야 합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주님을 위함입니다. 또한 진정한 헌신 속에는 복음의 정신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과 복음의 정수가 담긴 헌신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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