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목사(신일교회)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기쁨을 누리시나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놀라운 세계관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모두 분토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서 만의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내려와서 삶으로 체득된 지식을 말합니다. 신앙과 봉사와 희생을 포함한 전인격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지적인 차원의 지식이 아닙니다. 주님과 교제를 통한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히브리어로 ‘야다’에 속한 이 단어는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체험과 인격적 만남에 의해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그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신앙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패커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간접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아무리 신학자고 강연자고 목회자로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약간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양의 지식보다 값지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멋진 100%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갑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책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자로 문자로 지성에 호소합니다. 그 내용은 초월적이지만 방법은 인격적입니다. 인격적 만남에 의해 친밀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지식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지성인이 돼야 합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릅니다. 지식인이 지식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반면 지성인은 높은 지식과 지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식인이 곧 지성인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인은 지식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갈 때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앙의 지식인은 많지만 신앙의 지성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기독지성인이 필요합니다.

자아가 새롭게 되는 지성

바울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지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지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새롭게 거듭날 때 가능합니다. 자아가 새롭게 돼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새로워지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습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새롭게 될 때 새롭게 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생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변화되는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날 때 지성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성의 변화는 생각과 사고의 주체가 성령이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마음의 모든 생각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면 거짓된 자아는 숨게 됩니다. 거짓된 자아가 나타나면 진정한 자아는 숨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이 세상을 본받아 나타나는 자아입니다. 거짓된 자아는 우리가 사람에게 내보이는 자아입니다. 거짓된 표면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 개의 자아가 나오는데 ‘옛 자아’와 ‘새 자아’입니다. ‘옛 자아’는 ‘거듭나지 않은 자아’, ‘아담 안에서 존재하던 자아’를 말합니다. 반면 ‘새 자아’는 ‘그리스도인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말합니다. 이 ‘새로운 자아’를 가진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 ‘옛 자아’와 ‘새로운 자아’의 차이점이 뭘까요? ‘새로운 자아’는 새로운 지식에까지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자아는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인데 ‘깊고 완전한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지식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성의 특징은 생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라고 합니다. 결국 생각의 싸움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생각하는 지성인’이어야 합니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시켜 학살하도록 한 나치의 중간 간부였습니다. 아이히만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공무원이었고, 근면하고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대로, 의무에 따라 학살을 지시했을 뿐, 어떤 비열한 동기도 악행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생각 없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의지의 시작입니다. 생각을 기초로 해서 행동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생각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는 체험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은 체험입니다. 이 지식은 살아 있는 지식입니다.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본받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려고 합니다. 바울은 체험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예수님을 아는 생동감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 지식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이 지식은 우리가 힘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그분 때문에 기쁨이 생깁니다. 그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아가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이 충만한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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