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박사(총신신대원 역사신학)
이영식 박사(총신신대원 역사신학)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해 나라의 주권만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경제, 사회, 문화, 인간의 존엄성, 신체 및 언론과 집회의 자유, 40%의 아름다운 국토와 황금물결의 들녘 등 거의 모든 것을 침탈당했다. 심지어 일제는 한민족의 정신을 박탈하고, ‘포교규칙’ 등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눈물로 얼룩진 절망의 시대, 한국교회는 십자가 복음으로 소망을 제시했으며, 눈물을 훔치며 살아가던 동족을 가슴에 안고 고난의 언덕을 함께 넘어갔다. 말씀에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교파가 연합해 구국기도회를 했으며, 교회 절기에 십자가기와 태극기를 게양했고, 교회 자체에서 애국가를 지어 불렀다. 교회 담장에 갇혀서 비인도적 폭압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달려 나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자존의 대열에 앞장서서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시대적이고 민족적인 사명감과 백성으로서의 조국 독립에의 강렬한 염원 때문이었다.

3·1독립운동의 준비는 국내외서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으로 불처럼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됐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세계만방에 선포됐다. 이어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국 교역자와 미션스쿨 학생들, 기독교 청년들, 성도들이 그 대열에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제 3·1독립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3·1독립 정신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첫째, 폭압으로부터 자유,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 정신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은 ‘박탈된 한민족의 자유’를 위해 일제의 군국주의적 철권통치에 맞서 한민족 전체가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평화시위였다. 이것은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한민족이 집결한 하나 됨의 표출이었다. 그 선두와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둘째, 초기 한국교회의 애국애족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을미사변 직후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를 중심으로 모화관에서 집회를 열고 왕의 건강과 나라 회복을 위해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한 바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구국기도회를 열었고, 교회에서 애국가를 지어 불렀으며, 태극기를 게양하여 애국심을 고양했다.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에 대해 냉담했던 일반인들의 인식 전환을 가져오기도 했다. 애국애족 정신은 3·1독립만세운동에 승화됐다.

셋째, 한국교회의 사회와 민족에 대한 투철한 책임의식이다. 신앙의 선진들은 회의적이고 절망적인 환경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했으며,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과 이 민족의 독립이 하나님의 뜻이며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명이요 민족적 책임이라는 확신을 갖고 나아갔다. 이들도 가족이 있었고, 치열한 목회 현장이 있었으며, 주님이 맡기신 일터가 있었다.

넷째,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의 리더십의 동력(動力)은 기독교 본질의 충실함에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한 줄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고, 몸부림치며 지키려 했으며,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다. 그 본질에 충실했기에 그들은 사회와 민족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는 민족지도자였고, 민족지도자는 한국교회 지도자였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약화된 권위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빼앗겨본 경험이 있었던 선진들, 피바람이 온 강토를 휩쓸었던 6·25전쟁, 우리의 선진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와 국가를 쟁취하려 했다. 우리는 주어진 자유와 국가에 살고 있다. 교회의 본질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선진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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