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봉 목사(총회 통일목회개발원 전문위원장)
이수봉 목사(총회 통일목회개발원 전문위원장)

지난 해 북한의 김여정 부부장이 남조선이라는 용어 대신에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민족에 기초한 통일의 대상에서 통일할 수 없는 대상, 제1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통일 관련 조직을 해체하고, 통일 용어를 폐기하며, 상징물을 철거하는 등 남북관계를 통일을 전제로 하는 특수관계에서 통일할 수 없는 별개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평화공존을 주장하던 입장을 생각하면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데, 이러다가 통일이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두 국가론에 기초한 대북 정책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통일은 물건너 가고 있나? 80여년 동안 통일을 지향하던 한반도에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느냐가 문제다. 이 사태는 대전환인가? 소전환인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는 대전환이라고 해석한다. 대전환이라고 하면 두 국가론을 대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소전환이라고 하면 미세 조정 정도하면 된다고 축소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소전환이라는 전제하에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신중하게 대응하자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대전환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두 국가론은 이미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면서 국제법적으로 공인되었기 때문이다. 두 국가임을 인정한 남북 당국은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특수관계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선언적 차원과 실질적 정서적 차원이 다름을 의미한다. 김여정 부부장이 남조선이라는 호칭 대신에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에 놀라는 것은 1991년 유엔동시 가입의 의미를 잊었든지, 아니면 그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분위기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국가론과 주적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국가론은 이웃으로 공존한다는 의미가 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두 국가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국가론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다는 의미고, 전쟁을 해서 흡수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민족으로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서 통일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대남적화통일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두 국가론은 대전환을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관계의 대립적 후퇴이거나, 강경대치로의 전환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주적 개념은 1995년 우리 국방백서가 ‘주적은 북한’이라고 처음 명시했다. 10년 가까이 유지되던 ‘주적’ 표현은 2004년 국방백서에서 사라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주적 대신 ‘직접적인 군사 위협’,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 표현을 바꿨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했고, 문재인 정부는 이보다 한 단계 수위를 낮춰 북한 특정 없이 ‘주권·국토·국민·재산을 위협·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만 국방백서에 적시했다. 윤 정부의 국방백서는 아직 ‘주적’을 담고 있지 않는다. 문 정부보다 한 단계 수위를 높여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2022 국방백서’에 6년 만에 새로 추가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북한에서 주적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2020년 6월 조선중앙통신 논평에서 문재인 정부를 ‘주적’으로 간주한 때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듬해 10월 “미국과 남조선은 주적 대상에서 배제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던 것이 윤 정부가 출범하면서 김여정 부부장이 “(남조선은) 우리의 불법의 주적”이라고 다시 규정하였다.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도 이번에 직접 가세하면서 대남 공세의 수위를 끌어올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적개념은 북한보다 남한에서 더 오랫동안 더 많이 사용하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우리의 입장에 호응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에서 북한의 최근 행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분단이 고착화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통일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험한 말로 남한과 우리 대통령을 비난할 때보다 이번 발언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부가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이혼의 상처만큼 크지는 않다. 혹시 이혼하는 것 아니야라는 느낌은 다르다.

남북한은 서로 전쟁을 한 관계이다. 지금도 휴전 상태다. 따라서 전쟁 트라우마 정도가 아니라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 이것은 쉽게 치유되거나 잊혀지지 않는 상처다. 이것은 분단의 아픔이다. 분단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북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 가까워져도 멀어져도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도록 노력하면 그 동안의 아픔은 분단을 치유하고 통일로 나가는 노력으로 추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행태를 보고 비난하거나 시비를 가리려고 하기 보다는 북한이 왜 그렇게 나오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남한이 북한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우리는 분단의 아픔에 휘둘이기 보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가는 경험과 가치를 축적하게 된다.

대전환인가? 소전환인가?를 논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에 때라 소전환도 대전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대전환이라고 성급하게 규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통일이 멀어지고, 두 국가로 남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대신 북한이 큰 소리를 치지만 전쟁할 능력이 없다든지, 북한 내부용이라든지 이렇게 평가절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면 북한의 태도가 더 강화될 것이고, 분단의 아픔은 더 커진다. 반대로 북한의 행태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검토하고, 성의껏 대응해야 한다. 이것은 국변 전환을 위해 북한에 중요한 신호가 될 것이다. 대결 구도에서 해석하지 말고, 평화와 통일의 구도에서 해석해야 한다. 대결 구도에서 해석하면 대결국면이 확대될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구도에서 해석하면 평화와 통일국면이 조성될 것이다. 학자들도 책임감을 갖고 사태를 해석해야 하며, 정부도 정치적 포퓰리즘의 유혹을 관리해야 한다. 교회는 성경의 가치에 기초하여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남한의 젊은 세대의 통일 무관심과 연결하며 북한의 주장을 확대해석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통일기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구태로 해석하는 것은 경솔하다. 평화공존론을 시대의 변화로 해석하면서 앞서가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하나됨의 하나님이다. 분열은 성경의 가치가 아니다. 현실적 이익을 빙자하여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것은 분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한반도의 하나됨은 물론, 모든 민족이 복음 안에서 하나됨을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오늘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한발짝 물러서서 보면 길이 보인다. 지금은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고, 한발짝 물러서서 하나님의 눈으로 사태를 해석할 때이다. 성경에 답이 있다. 성경은 하나됨을 지로하고 있다. 과정과 목표를 혼동하지 말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소망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