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9~10)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영국의 침례교 목사인 윌리엄 캐리(1761~1834)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일컫습니다. 당시는 어느 누구도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30대의 윌리엄 캐리를 사용하셔서 영국교회의 선교열정을 깨우시고, 세계를 향해 선교의 포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이후 영국뿐 아니라 세계교회에 선교단체들이 조직됐고, 수많은 젊은이가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19세기는 선교의 황금시대를 맞게 됐습니다. 윌리엄 캐리 자신도 평생을 인도선교사로 헌신하다가 73세를 일기로 인도 땅에 묻혔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제2의 선교 황금시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교회의 선교열정은 싸늘하게 식고 말았습니다. 선교예산을 줄이는가 하면, 선교지원을 끊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하는 지원자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도 점점 감소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선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국제적인 추세도 한 원인이지만,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본질적 사명인 선교를 멈출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마다 ‘다시 선교’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선교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여는 터닝 포인트가 됐습니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선교여행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아시아에만 머물러있던 복음이 유럽대륙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선교의 방향을 돌렸던 바울의 결단은 선교하는 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성령(6절), 예수(7절), 하나님(10절),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이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에 대해 민감한 영성을 가진 교회가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장 영적일 때, 가장 영성이 깊을 때, 가장 은혜가 충만할 때 가능한 사역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하면 전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멈추지 않고 선교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중 안디옥교회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행 13:1~4) 그들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얼마나 영적으로 민감했는지 모릅니다. 안디옥교회를 통해 선교의 전 과정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이뤄지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금식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파송할 때도 기도하면서 파송했습니다. 그렇게 보냄 받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성경은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파송을 받았다고 할 만큼, 안디옥교회는 성령께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신들과 함께하신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과연 선교하는 교회는 다릅니다. 바울이 아시아를 넘어 배를 타고 유럽대륙을 향해 나아간 것처럼, 현재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는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한계를 뛰어넘어 선교의 지경을 넓혀나가는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본문에 바울이 진로를 바꿔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다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절)

이 말은 바울의 선교관을 잘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선교가 가능해집니다. 바울은 유럽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했을 때, 모든 것을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이 선교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는 데서 그치기 때문입니다. “선교요? 당연히 해야죠!”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지식을 넘어,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선교를 교회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건물의 규모나 성도의 숫자로 매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선교에 있습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 상관없이,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귀한 교회입니다.

선교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은 교회에 복음을 맡기셨습니다.(살전 2:4) 성자 예수님은 교회에 사명을 주셨습니다.(막 16:15) 성령 하나님은 계속해서 교회에 능력을 부어주십니다.(행 1:8)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를 교회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고, 바울처럼 주저 없이 바다를 건너는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봅니다

본문에 바울이 선교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했던 결정적인 계기도 나옵니다. 바로 환상을 본 것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절)

사도행전에만 ‘환상’이란 단어가 10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도행전에서 선교를 위해 쓰임 받은 인물들은 환상에 이끌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환상은 비전을 가리킵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객관적 비전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교회에 대한 바람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바라는 것을 성취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곳입니다. 선교에 헌신하려면, 교회에 바라는 각자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봐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주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객관적 비전으로 하나 되어 세계선교를 꿈꾸는 비전공동체입니다.

바울은 환상 속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입니다. 역사적으로 내전이 끊이지 않는 고통과 죽음의 땅입니다. 분명 마게도냐 사람의 소리는 처절한 울음소리였을 것입니다. “건너 와서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이 소리는 바울에게 깊은 울림이 되었고, 지체 없이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선교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와 선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선교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세계비전을 봅니다. 한국교회에 ‘다시 선교’ 운동이 일어나서, 제2의 선교 황금시대가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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