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본문은 한 서기관이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인지 예수님께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소위 ‘으뜸 되는 계명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을 근간으로 구약에 나오는 계명들을 모아 보면, 모두 613개나 됩니다. 율법사가 그 많은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은 것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저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이야말로 한국교회가 풀어야할 오랜 숙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들만 아는 이기집단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요즘은 교회가 사회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아도, 성도들이 사랑할 줄 모릅니다. 서로 반목하고 분쟁하기 일쑤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직분까지 받은 사람들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연조가 많을수록 하나님은 잘 믿는데, 인간관계는 잘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이웃과는 잘 지내지 못합니다. 사랑의 숙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 다 가장 큰 계명입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우리는 첫째, 둘째라는 순서만 보고 앞에 나오는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다가, 이웃 사랑을 등한히 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급하시고 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하나님 사랑’만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이웃 사랑까지 언급하시고 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가 똑같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에게는 애당초 사랑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은 열심히 잘 믿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첫째는’, ‘둘째는’ 하면서 이 둘을 나누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것은 먼저와 나중의 서열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각기 다른 별개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전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한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랑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는 사랑의 방법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30~31절) 성경은 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여러 단어들을 사용해서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라’는 것은 결국 ‘네 온 몸을 다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내 일부분만 드려서는 안 됩니다. 내 몸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할 때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 전부를 다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그 방법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잘 합니다. 자기 사랑은 본능입니다. 자기를 사랑할 때는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 되게 사랑합니다. 종합병원의 암 병동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곳의 환자들은 고통스런 치료과정을 희생을 무릅쓰고 참아냅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도 끝까지 견딥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했습니다.(요일 3:18) 기독교윤리의 핵심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과 행동으로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진실함을 보태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예배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던 서기관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말했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3절) 오늘날로 말하면,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배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을 기뻐 받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35)

인생의 성패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사랑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랑을 나타냅니다. 새해에는 한국교회에 ‘다시 사랑’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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