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새해에 참된 예배자 되어 부흥을 경험하십시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삼하 6:14~15)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조상용 목사(대전중부교회)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삶의 질서가 회복되고, 개인의 영성이 회복됩니다. 현재 나의 삶이 텅 빈 것 같고 탁 막힌 것 같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 주요 원인이 예배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에이든 토저(Aiden W. Toze)는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패는 예배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배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의 부흥과 직결됩니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교회의 부흥을 원한다면, 반드시 그 전에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2024년 새해는 개인마다 교회마다 예배를 온전히 회복해서 예배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회복돼야 한다고 해서 예배의 형식이나 순서를 바꾸자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는 습관적인 예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서 참된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윗의 태도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옮깁니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예배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을 통해 예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배워봅시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쁨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습니다.(12절)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과 온 이스라엘도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팔을 불고 기뻐했습니다.(15절) 왜 기뻐했을까요? 다윗은 왕이 된 후에 블레셋 족속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의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이 회복됩니다. 세상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께만 집중합니다. 그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됩니다.

다윗의 기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올 때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16절) 다윗이 춤까지 추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또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아마도 다윗이 왕의 체면을 생각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했다면 절대로 춤을 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몰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은혜와 받은 축복을 생각하면, 너무나 기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는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의식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식은 예배에 안정감을 주지만, 의식에 매이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다윗이 만일 예배를 의식으로만 알았다면, 순서에 따라 근엄하게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과 함께 ‘드린다’는 단어도 많이 나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도 소와 살찐 송아지를 제사로 드렸고(13절),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서는 다윗의 장막에 하나님의 궤를 모신 후에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7절) 그렇습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마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은혜받았다고 말하면서 돌아갑니다. 예배는 은혜받기 위해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기 위해서 참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최고의 존엄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야말로 내 마음과 몸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 중에서 예배가 최우선적인 사역이 돼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아브라함과 관련한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도착한 후에, 자신의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아들 이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예배를 인정해 주셨습니다.(창 22:12) 교회들마다 주일 오후나 저녁에 기관별로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배의 의미를 알고 나면, 모든 예배가 헌신예배입니다. 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예배를 회복할 때, 예배는 살아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기쁨’과 ‘드린다’ 외에, 또 다른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바로 ‘여호와 앞에서’라는 표현입니다.(14, 16, 21절) 알고 보니 다윗이 춤을 춘 것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무엇인지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예배는 앉아서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러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전인격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몰랐던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16절) 그에게 있어서 예배는 단지 ‘사람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러 오지 않고, 사람을 만나러 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의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 유명한 목사님이 와서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평소보다 많은 청중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정으로 인해 그 목사님이 오지 못하게 되자, 실망한 몇몇 사람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유명한 설교자를 예배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 있다면 지금 모두 나가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오셨다면 자리에 모두 앉아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관심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있는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역대하 16장 9절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구절에 예배라는 단어는 없지만, 예배와 동의어가 나옵니다.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향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눈에 발견돼,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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