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원로)
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원로)

교회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교회사는 여전히 그 은혜의 수혜자들이 좌우로 치우치는 진자 운동의 실상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최고의 제도인 ‘설교’에 있어서 ‘우로나 좌로 치우지 말아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교리’와 ‘삶’의 두 요점은 모든 설교가 견지할 진수적 요소임을 누가 부인하랴. 교회사 속에서 찬란한 영적부흥과 각성 시대의 대표적인 설교들은 한결같이 ‘구원의 교리’와 ‘구원받은 이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균형을 견지하는 특성을 가진다. ‘구원교리만 있고 구원받은 자의 삶은 말하지 않는 설교’ ‘구원교리는 없고 삶만 말하는 설교’는 둘 다 신약에 제시된 ‘사도적 설교의 본’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필자의 지나친 염려일 뿐이면 좋겠는데, 오늘날 소위 대형교회들의 설교 추세는 ‘구원교리는 없고 삶에 집중된’ 모양새다. 이런 추세가 구원교리만 강조하고 구원받은 자의 복음에 합당한 삶의 강조가 없는 설교에 대한 반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추세가 어떤 동기로 야기됐다 할지라도 정당할 수 없다. 거기다가 오늘날 설교자의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풍조에 자극을 받아 그런 추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물론 필자가 그런 추세의 설교들이 ‘믿는 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설교들도 삶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이라고 늘 강조는 한다. 그런데 그런 설교들에는 믿는 자와 하나님만 있고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의 속량의 교리’는 없다. 이런 지적을 하면 대번에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하나님을 거론할 때 그 속에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 식의 대꾸에 대하여 필자가 반박하고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량의 진리를 숨겨 놓지 않고 전면에 광포하고 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 중보 사역을 늘 그들의 설교의 중심에 두었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만 말하면, 반드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중보자를 끼워 넣는 악한 마귀의 수작에 마당을 내어 주는 꼴이다.”

보편구원론과 각종 이단들은 한결같이 믿는 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그에 입각한 삶에 대해 가장 큰 열심을 보이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치명적 결함은 중보자의 중보 사역전체에 대한 그릇됨이다. 그래서 오늘 현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자기 설교 사역 전체를 함축한 두 대목의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말이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21,22)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여기서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이 주는 구원과 구원 이후 복음에 합당한 삶을 다 함축하는 성경적 독특한 표현이다. 인문학의 접근은 구원(생명)은 필요 없고 다만 그 사람의 자아의 발현으로서의 삶만 있다.

설교자가 인문학의 교양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다. 그 인문학에서 진리의 면모를 빌려오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의 탁월성을 변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울이 인문학의 꽃인 철학을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치부하였음을 명심하라. 성경의 복음이 인문학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나약한가? 중세교회는 미련하게도 철학의 틀에 성경을 꿰어 맞추려 했다. 반면 종교개혁 이후 대(大)설교가 루터,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이나 로이드 존스가 오직 성경만으로 인생을 논했다. 

사도적 설교는 그 회중이 이미 복음을 이미 알고, 믿고 있더라도 반드시 삶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반드시 먼저 구원의 복음을 상기시키는 일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자아의 발현이 아니라 영생 얻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다.(요 17:3; 요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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