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언제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열심히 살았노라고 하지만 딱히 해놓은 것은 없이 그냥 한 해가 지났기 때문이다. 막연한 덧없음 속에 인생은 그렇게 또 흘러가리라는 패배감마저 찾아든다.

사람들은 이런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보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의 불빛과는 부조화하지만, 술과 파티로 연말을 보낸다. 독주(毒酒)를 마시며 지난 시간들을 망년(忘年)해 보려고 한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것이 잊혀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소망들을 가져보는가 보다.

독주라는 단어, 참 재미있다. 그 뜻이 참으로 많다. 먼저는 ‘독한 술’이라는 의미의 독주(毒酒)가 있고, 또 ‘혼자 달린다’는 의미의 독주(獨走)가 있다. 그리고 ‘혼자 연주한다’는 의미의 독주(獨奏)도 있다. 잘 사용되지는 않지만, ‘임금에게 아뢸 문서를 어전에서 읽는 것‘을 가리키는 독주(讀奏)도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지닌 내용들을 보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독한 술은 건강에 위험하고, 혼자 내달리는 것은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혼자 연주하는 것은 조화를 깨뜨릴 수도 있다. 또한 임금 앞에서 글을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독주라는 단어는 어떤 것이든지 위험함을 보여준다.

교회와 교단을 섬기는 사람들이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독주다. 지도자의 독주를 일컬어 사람들은 그것을 ‘독재’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독주가 탁월한 연주가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짓누르고 억압함으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파괴하기도 한다. 장로교회의 정치는 협치를 근간으로 한다. 무엇이든지 혼자 할 수 없게 했다.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모든 일들이 반드시 협치로 이루어지게 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홀로 주가 되시는 분은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어떤 경건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죄인일 뿐이다. 교회의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맡기실 때,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셨다. 각각의 은사와 직분을 따라 다른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하게 하셨다. 목사와 장로가 협력해야 하고, 장로와 집사가 협력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함께 협력해야 한다. 목사가 교회를 독주하거나 장로가 독주하면, 일정부분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크 엘륄은 “권력의 실행은 항상 위험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셨는데, 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것으로 독주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경우, 이런 독주는 커다란 문제를 낳았다. 히틀러의 독주가 그러했고, 레닌이나 스탈린의 독주가 그러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자신의 신념 속에 무자비한 독주를 감행했다. 그는 그가 원하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평등하고 행복한 낙원이 아니라, 잔인한 학살이 만연한 킬링 필드가 되고 말았다.

가끔 교단 안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독주가 행해지는 것을 본다. 개혁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기에 솔리스트의 아름다운 독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독주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전제 속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하는 일은 거룩하고 고결한 개혁이고, 다른 사람은 척결 대상으로 본다. 이는 무서운 독선이며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내 생각을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합체 구성에 골몰함이 아닌, 나와 다른 사람을 기꺼이 품어야 한다. 때로는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협치를 이루는 것이 장로회주의가 말하는 개혁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열면서 온갖 무상함을 느낀다. 많은 수고와 노력은 했으나, 내세울 만한 성과는 없다. “그래, 이게 내 모습이야. 그러니 독주할 것이 없어. 합치하고, 협력하는 것이야.” 이 작은 깨달음이 성탄의 잔잔한 캐럴과 함께 아름다운 연합의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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