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목사(람원교회)

우리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3:9)

 

김수환 목사(람원교회)
김수환 목사(람원교회)

여호수아 사후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등장하는 그 순간까지, 어림잡아 350년간의 시기를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즉 왕정 이전 이스라엘은 12지파 연합체로 느슨하게 운영이 됐고 상설 리더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위기를 통해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소위 ‘사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이끌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사사의 역할은 평시에 재판하고 전시에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대략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혼란과 역경의 시기에 나타나서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를 구원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읽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드보라와 기드온 그리고 단연 삼손일 것입니다.

돌고 도는 반역의 역사

사사기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마치 장군과 멍군처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주고받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하나님의) 징계-(이스라엘의) 회개-(하나님의) 구원’ 이 패턴은 사사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에 보편적으로 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렀고 진즉 멸망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삿 3:8) 8년간 타국의 통치를 받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고치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죄악 가운데 버려두셨을 것입니다. 회초리도 은혜입니다.

8년간의 압제로 고통받던 이스라엘은 잊었던 하나님을 소환하여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삿 3:9) 고통 중에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절정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 ‘한 구원자’ 옷니엘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옷니엘을 비롯한 사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영단번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결과입니다.

번성할수록 범죄하는 백성

사사기의 역사에 가장 안타까운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평화를 되찾았다면 계속해 하나님을 섬기면 될 터인데 다시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했다는 점입니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삿 3:11~12) 또 악을 행했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또 회개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병에서, 가난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구원받았을 때 감사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또 그 악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호세아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가 고뇌한 지점입니다. 번영과 평화는 사람을 안일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지난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망각하고 다시 범죄했고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릅니다. 이처럼 고난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고 반복하는 것이 사사시대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성경은 어둡고 혼란한 역사가 반복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람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소위 무정부 상태입니다. 그것이 어둠과 혼란의 주범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은 자녀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더 나쁜 건 부모의 방임을 마치 자녀들을 존중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훈계와 양육이 없이 자라난 자녀들은 반드시 부모의 근심이 되고 사회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 경험이 많더라도 무언가에 의해 지도받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사사기에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삿 17:6, 18:1, 19:1, 21:25) 여기서 ‘왕이 없다’는 것은 정치 제도로서의 왕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고 그들 마음에 드는 왕을 세워서 자기들 뜻대로, 자기들 욕심대로 살아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본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잘 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암울했던 암흑시대입니다. 각종 혼란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자들의 결말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메시지입니다.

요즘 ‘챗GPT’, 대화형 인공지능이 뜨거운 관심사입니다. 컴퓨터에게 질문하고 답을 구합니다. 설교 원고도 작성해준다고 해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정보를 제공받고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만 인공지능의 통치를 받는 수준이라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중대한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인생을 통치하는 유일하신 왕,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고 그분에게 물어보고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나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하심 아래 인생의 모든 고통과 혼란이 종식되고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가 차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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