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원로)
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원로)

근자에 어떤 분이 ‘신학은 완전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정당한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의존하고 견지해 온 교리체계가 비성경적이고, 내가 이해하고 주장하는 바가 성경적이다’는 식의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라면 힘이 없어진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블로그에서 자기 주장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실명을 밝히며 ‘아무개는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는데, 가히 그것은 극한 명예훼손이요 신학의 공론적 특성을 무시한 진기 없는 공언(空言)일 뿐이다.

‘신학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성경에 대한 신학이 필요 없다, 신학은 다 틀리니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식의 논리를 결코 지원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경해석이라는 신학작업을 절대로 요구하는’ 책이다. 성경은 모든 이들이 읽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성경은 읽는 자가 누구든지 쉽게 그 말하는 바를 다 깨닫게 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 27) 이 예수님의 방식은 참된 신학의 필요를 보여준다.

신학은 ‘성경에 대한 몇몇 소수의 해석과 이해의 열매’가 아니다. 참된 신학적 열매로서의 교리는 치열한 공론과 공방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으로서 ‘공의회의 공인(公認)’을 받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립된 개혁주의 교리 중에 그런 과정 없이 나온 것은 없다. 그런 신학적 작업은 교회사의 이전 시대 속에서 정돈된 교리체계를 참조하는 일을 반드시 수반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역사성을 생명처럼 여긴다. 그래서 개혁신학의 목표는 ‘하나님의 교회(성도)가 공히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삼위 하나님과 그 뜻과 그 행사에 대한 정당한 신앙고백과 그에 합당한 행위의 표준’을 제시하는 데 있다.

교회사의 초기에 나온 ‘사도신경’과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과 신앙의 표준문서들, 즉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벨직 신앙고백서, 그 밖에 개혁주의적 견지에서 나온 여러 신앙고백서들은 그런 공적 신학 작업의 열매들’이다.

우리 장로교단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부속 표준문서들 작성은 어떠한가?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공인을 받아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모여 1643년부터 1647년까지 5년여 동안 151명의 정회원들과 옵서버 소수가 1163회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그 표준문서를 작성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신학적 제의나 이의나 반론을 다 받아 신학적 토론을 거쳐 최종 완성본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1648년에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총회가 이를 채택했다.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앙과 신학의 표준문서’들 중에서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교단 또는 그 교회의 영성과 진로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견지에서 1648년 이후 구미(歐美)의 유수한 장로교단과 개혁교단들, 그 후 시대의 피선교지의 모든 장로회 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고백의 표준문서’로 채택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이 인준하는 신학대학원들 전체가 그 ‘표준문서’로 제시된 개혁주의 신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총회 신학부는 그 표준문서의 규범에 준해서만 수임된 사안들을 다루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이대위원회의 활동도 그 표준문서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이 ‘표준문서’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면 총회 신학부는 신속하게 대응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표준문서에 입각해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고, 총회는 그것을 검토하고 공식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이번 108회 총회에서 신학부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 준비론’에 대한 사안도 그런 차원에서 다루고 총회에 보고했고, 총회가 그 보고를 받아 정돈하였다. 잘 한 일이다.

우리 교단 소속 교회들의 연합의 요건은 오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부속 문서들로 표현된 신학과 신앙고백의 일치’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을 거부하면 탈교단적 행위가 된다. 새삼스럽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신학 아닌 다른 데서 찾으려는 오늘의 경향에서 이 요점은 매우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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