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앞두고 만난
희생자 최재혁 씨 어머니 김현숙 권사
"기독교 외면 섭섭…담장 허물어달라"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는 29일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지난 16일부터 두 주간을 집중추모기간으로 정한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을 다짐하는 동시에 안전사회를 향한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고 최재혁 씨가 생전 어머니 김현숙 권사와 함께한 모습. 김 권사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항상 순종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고 최재혁 씨가 생전 어머니 김현숙 권사와 함께한 모습. 김 권사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항상 순종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지난 1년 유가족들의 곁에서 아픔을 나누고 소망을 전해온 그리스도인들도 1주기를 맞아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0.29이태원참사를기억하고행동하는그리스도인모임이 16일 개최한 신학교간담회도 그중 하나였다. 이 자리에 초청된 희생자 최재혁 씨의 어머니 김현숙 권사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자신이 몸담은 기독교의 외면에 섭섭함을 토로하며, 신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19일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 답답한 모습이었다. “너무 궁금했어요. 소외된 자들을 먼저 살펴보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했는데 도대체 교회는 왜 조용한지. 귀신 축제에 갔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아니면 이게 정치적인 문제여서인지, 너무 묻고 싶고 이유를 알고 싶어서 간담회에 자청해서 나갔어요.”

김 권사의 아들인 고 최재혁 씨는 초등학생 두 아들을 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항상 순종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뱉은 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성실한 사람으로 밖에서도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정도 많아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때,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아와 4일장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가 이 땅에서 걸어온 47년의 여정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최 씨는 지난해 10월 29일 긴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가져온 옛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을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술을 마시지 않던 그는 동료들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 참사에 휩쓸리고 말았다. 1년에 절반은 해외로 출장을 나갔던 터라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 된 고인의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지금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늘나라로 출장을 가 있는 상태다.

“아들에 대해 솟구쳐 오르는 안타까움과 며느리와 손주들에 대한 아픈 마음에 정말 몸 사리지 않고 뭐든 했던 것 같아요.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력이 나빠지니까 아들에 대해서 기억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손주들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고,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들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싸웠죠.”

젊은 시절부터 합동 교단에서 보수 신앙을 견지해 온 김 권사는 그동안 49재와 삼보일배 등 유가족협의회 활동과는 방향이 맞지 않아 거리를 둬왔다. 다만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 가운데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엄청난 일이 인생을 덮치자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길에서 같이 울어주고 얘기를 들어주며 쉼 없이 연락하고 맛집과 여행지 곳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함께해 준 구역 식구들의 존재는 큰 힘이 됐지만, 때때로 위로를 위해 건네는 ‘하나님의 뜻’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주시는 시련’ 등 평소 힘이 되던 교회 사람들의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는 믿음 속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오래전 교회에 계시던 목사님께서 소식을 듣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어요’라고 불평을 부렸는데, ‘원망하십시오. 권사님은 얼마든지 원망할 자격이 있으십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지, 그때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이사야서 41장 10절과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부여잡고 날마다 기도하며 견디고 있습니다.”

말씀 중심의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던 그에게 이번 일은 또 다른 아픔이기도 했다. 타 종교, 타 교단에 비해 무관심한 모습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어려운 일을 겪어 보니까 교회, 특히 보수 교단의 담이 너무 높다고 느꼈어요. 담 안에서 나누는 사랑은 나무랄 데 없지만 담 밖의 어려움은 쳐다보지 않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들도 복음을 들을 대상인데 넘어오지 못하도록 높은 담을 쌓고 있더라고요. 둘째 아들이 처음 형 소식을 전했을 때 듣자마자 했던 첫 마디가 ‘걔가 거기를 왜 갔대?’였어요. 세월호 때도 그렇고 큰 사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무관심하게 살아왔죠. 지금 기독교의 외면을 원망하고 있지만 저 역시도 이 사건이 나기 전까지는 똑같은 삶을 살아온 거죠.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담을 허물고 우물가의 여인을 안듯이 담밖에 사람들을 돌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있어서 보수이지, 사랑의 실천조차 보수인 것은 아니니까요.”

1주기를 앞두고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 사람들에게 잊혀 간다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그나마 이렇게라도 꿈틀거리지 않으면 모든 이들에게 잊힐까 두렵다”며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심정으로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과 안전 사회를 이뤄가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이어 끝으로 신학교간담회 당시 준비했으나 시간 관계상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성도와 아이들에게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정말 안전하고 올바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일도 지켜나갈 사명이 아닐까요?”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