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애 팀장(10·29이태원참사를기억하고행동하는그리스도인모임,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김지애 팀장
(10·29이태원참사를기억하고행동하는그리스도인모임, ​​​​​​​​​​​​​​​​​​​​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예수의 행적이 있다. 바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일’(요 4:46~54)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의 왕은 역사에서도 성서에서도 악명 높은 ‘헤롯’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두려워 수많은 예루살렘의 남아를 살해했고, 유대의 왕이었으나 로마제국의 앞잡이처럼 행동했다. 예수는 헤롯의 무자비한 행보에 늘 두렵고 지쳐있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헤롯왕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달랐을 것이다. 친로마 정책으로 나라가 점점 부유해지고 본인들의 권력은 높아져만 갔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라곤 로마제국 외엔 없었을 것이다. 그런 권력을 가진 왕의 신하가 예수를 찾아와 애원한다. 예수가 갈릴리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제 발로 찾아와 간청한다.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는 그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지위의 사람인지, 그가 어떤 신앙으로 살고 있는지, 그에게 과연 신앙이 있긴 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왕의 신하라는 이에게 진짜로 내가 너에게 필요한 것인지, 내 말을 믿는 것인지만을 물었다. 아들이 죽어가는 시점에 신하는 예수의 말이 절실히도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신하의 마음 옆에 서서 그의 아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인이 필요했다. 가족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는지는 가족들 스스로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삶을 종료 당한 내 자녀, 자매, 형제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갑작스레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에게 교회에서 흔히 들리는 위로와 추모의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20년, 30년 아니 40년을 넘게 함께 호흡해 온 사랑하는 자녀, 자매, 형제를 잃은 이들에게 천국이 필요했고, 그 천국에 꼭 있을 것이라는 그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회엔 예수의 마음이 없었다. ‘왜 그곳에 갔느냐?’,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자녀를 그런 곳에 가게 두었냐?’ 등 가족들을 향한 직접적인 말과 간접적인 비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정부를 향해 ‘일상을 살던 이들이 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는가?’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이 사망한 이 참사를 보며,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안전을 찾아야 하는지 물어야 했다.

이제 곧 10.29 이태원 참사 발생 1주기다. 여전히 가족들은 거리에 나와 있고, 더 많은 유가족이 용기를 내 먼저 거리에 나선 유가족 곁에 서고 있다. 여전히 유가족들은 교회의 걸음을 기다린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억하고 그 삶을 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가족의 자리에 함께 서서 기도해 주길, 위로의 손을 잡아주길 기대한다.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되기도 전, 지난여름 또다시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했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 무너진 ‘안전’에 대해 사회를 향해 묻고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2000년 전,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예수라는 청년을 기억하고, 부활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기억의 힘을 믿으며 2022년 10월 29일 희생된 159명의 안식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억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나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10.29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 기억의 힘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힘을 덧입어 진실에 천천히 가 닿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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