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규 총장(총신대)

박성규 목사(총신대학교 총장)
박성규 목사(총신대학교 총장)

제가 고  오상진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81년,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입니다. 제가 아들 같은 목사로서 지난 42년 지켜봐 온 오 목사님의 생애는 승리의 생애였습니다. 목사님은 바울 사도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그러셨습니다.

1. 고 오상진 목사님은 참 목회자셨습니다.

가야제일교회를 개척하시고 44년 목회를 해오시면서 달동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해온 오 목사님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목회를 해오셨습니다. 목사님을 힘들게 했던 일 중 교회 건축을 할 때 재정을 맡은 분이 돈을 가지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묵묵히 사례비를 교회에 다 헌금하시고, 부산 혜광고등학교 교목이 되어 섬기시면서 받은 사례로 가족들의 생계를 이끄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 목사님의 교목 생활을 통해 수많은 청소년의 가슴 속에 예수님을 심으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혜광고등학교를 다니던 현재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입니다.

2. 고 오상진 목사님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개혁주의자, 곧 칼빈주의자였습니다.

1982년 3월 1일 정동 CCC 회관에서 열린 오정현 목사님 결혼식과 1983년 3월 1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오정호 목사님 결혼식에 참석했던 저는 그 때의 혼주 측 인사를 기억합니다. “저는 한 번도 이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잘될 때 하나님보다 먼저 기뻐하지 않았고, 이 아들이 잘되지 않을 때 하나님보다 먼저 안타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 아들이 이루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지난 42년 동안 이런 혼주 인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절대주권의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오정호 목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주말마다 반성문을 썼어요. 그때마다 아버님은 ‘신앙의 기본이 무엇이냐?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오정현 목사님과 오정호 목사님을 이렇게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3. 고 오상진 목사님은 오직 성경을 믿는 개혁주의자였습니다.

오정현 목사님 말씀을 통해 들은 것은 매삼주오(每三主五)하지 않으면 집에서 밥도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사랑하게 하신 것이, 오늘의 두 오 목사님을 낳았습니다.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다 아실 것입니다. 오상진 목사님은 오정현 목사님이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올 때 부산역에서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오 목사님은 아버님께서 용돈을 주신 줄 알고 기대감을 갖고 열어보니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청년 오정현은 실망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말씀이 청년 오정현을 붙잡아 주었고 오늘의 오정현 목사님을 만들었습니다.

오상진 목사님은 서울에서 공부하는 세 아드님을 위해 가장 저렴한 아파트를 어렵게 전세로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곳은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부흥의 산실이었습니다. 지방 출신 대학생 중 대학부를 이끌 사람들을 오정현 전도사님은 그곳에 모아 살면서 대학부의 부흥을 위해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오 전도사님은 그곳을 프란시스 쉐퍼 박사(Francis A. Schaeffer)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무너진 유럽 의 젊은이들을 살리기 위해 스위스에 만들었던 라브리(L'abri) 이름을 따서 L'abri라고 불렀습니다. 고 오상진 목사님께서 한 번씩 그곳에 오시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경 말씀을 선물로 주셨고, 그곳에서 황원선 목사, 화종부 목사, 정규선 박사, 이상진 박사 등이 배출됐고, 미말에 처한 저도 그곳에서 자라났습니다.

4. 고 오상진 목사님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개혁주의자였습니다.

1963년 1월 1일 세운 가훈의 첫 번째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가훈은 오상진 목사님의 삶이 되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자신이 하신 일, 두 분 아드님의 영향력 있는 목회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개혁주의자였습니다.

5. 목사들의 목사이셨습니다.

중부산노회 노회장을 두 번 역임하시면서, 부산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시면서 오 목 사님은 항상 다음세대 목사들을 돕는 일을 하셨습니다. 저의 가장 가까운 후배 목사님이 목회에 가장 큰 위기를 만났을 때, 앞장서서 그 목사님을 살려주어 벌써 20년이 넘는 목회, 그리고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목회자가 갈 곳이 없을 때 다리를 놓아 그들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제가 부전교회 갈 때도 최고의 추천을 해주신 분이셨습니다.

6. 자녀교육에 성공하신 목사셨습니다.

리더십 이론에 “계승자가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정현 목사님, 오정호 목사님, 오기원 목사, 오기환 목사 3대의 목사가 배출된 것은 오상진 목사님은 성공한 목회자임을 보여줍니다. 또 오상진 목사님은 규모는 작아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셨습니다. 김제돈 목사, 정명기 장로 등입니다. 더욱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끄는 두 아드님을 배출하신 것은 목사님의 기도와 눈물, 삶의 모범이 교과서가 되어 오늘의 오정현 목사님, 오정호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지금 드린 말씀 외에도 고 오상진 목사님의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나누어야 할 일 들이 많지만, 오상진 목사님은 승리한 목회자요, 승리한 아버님이십니다. 이렇게 귀한 89년의 생애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7. 우리 인생의 모델이 되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아버님, 할아버님, 증조할아버님을 모신 유족들은 행복한 후손들입니다. 이제 는 이 신앙을 이어받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고 오상진 목사님께서 사랑하셨던 말씀 중에 하나인 사도행전 20장 24절을 소개함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제가 목사 안수 받은 후 제게 말씀하시기를 “박 목사, 사명은 힘들어도, 굶어도, 심지어 죽어도 감당해야 해!” 이 말씀이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언젠가 천국에서 기쁘게 만날 목사님을 추모하며 말씀하신 대로 주님 주신 사명에 목숨 걸고 살다가 기쁘게 뵙겠습니다.

※ 고 오상진 목사는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오정호 목사(부총회장, 새로남교회)의 부친으로 지난 8월 3일 8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글은 8월 5일 총회 주관으로 강남성모병원에서 드린 유족위로예배에서 박성규 총장이 한 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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