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전 중에 흥부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 흥부는 매우 착하다. 그러나 가난하고 무능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들다. 다행히 착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 덕분에 큰 부자가 되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된다. 착하게 살아 복을 받는다는 기본적인 교훈을 주는 작품이다. 착하긴 한데 능력이 없는 사람, 속된 말로 착하기만 할 뿐 가족들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왜 착한 인품에 무능력을 덧입혔을까? 악한 사람의 교활함과 그로 인한 온갖 부조리도 용납할 수 없지만, 착하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살아갈 능력조차 없는 것 역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도 악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무능력도 엄밀한 의미에선 악일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지혜로우며 아울러 그가 하는 일에서 꽤 큰 능력을 드러낸다. 더욱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 착한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더 개발하여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내고, 이웃에게 좋은 것을 베풀 수 있을 때 진정한 착함이 아니겠는가?

총회나 교계에서 마주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있다. 착한 것 같긴 한데, 능력은 도무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미는 계획서에는 성공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또 착한 사람들은 그런 현장에 등장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현상도 있다. 오히려 착하지 않은데 열심히 하며 곳곳에서 능력을 드러내고, 성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착한 이들이 능력도 키우면 좋겠다. 또 숨지 말고 교단의 중요한 사역에 참여하라. 과거에 꽤 능력 있는 교계 인사 중에 축출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인사를 밀어낸 자리에 앉을 뛰어난 브레인이 없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착한 성품만 요구하지 않는다. 맡긴 일에 뛰어난 성과를 내기 원하신다. 착하고 능력 있는 인사들이 많다면 총회나 교계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지 않겠는가? 착한 목사, 장로들이여, 이 질문에 시원하게 답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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