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현 목사​​​​​​​​​​​​​​(함께하는교회)
오명현 목사​​​​​​​(함께하는교회)

폭우가 삼켜버린 삶의 터전은 돌아갈 수 없는 광야가 되었다. 임시 대피소에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수재민들은 사회 곳곳에서 보내온 생필품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다. 구호물품을 받은 어느 분이 먼저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마신다. 그들의 갈증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물(水), 평소에 풍부해서 그런지 물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우리 인간의 육체 중 70%가 물이기 때문에, 물이 무족하면 질병이 생기고, 심지어 생명이 위독해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물은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문명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세계사에서 문명의 4대 발생지를 언급할 때 강을 끼고 있는 곳들을 꼽았다. 중국의 황하 강, 인도의 인더스 강,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을 말이다. 우리나라도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증명하듯 수도 서울의 발전에 한강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고대 철학자 탈레스(Thales, BC. 624~546)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다. 만물은 물에서 발생하여 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물론 사람의 육체가 70% 이상이 수분이라고 하니 그럴 듯하다. 그러나 탈레스의 철학은 성경이 말하는 근본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水)이라는 명사 앞에 수식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질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식수’(食水), ‘오염수’(汚染水), ‘홍수’(洪水), ‘탁수’(濁水) 등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로움의 수준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동네마다 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마다 물통이 긴 줄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약수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약수터의 물이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약수터의 물도 오염되는구나’, 무분별한 개발이 약수터까지도 오염시켰다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의 순전한 신앙이 중세 말기에는 너무 오염되어 탁류가 되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안겨주었다. 핍박이 중단되고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지배하면서 부유해졌다. 문제는 중세 기독교가 순전한 신앙을 돈과 바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운동이 일어났다.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를 떠나서 외로운 장소, 즉 사막이나 공동묘지 혹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교회가 타락하면 교인들은 순전한 신앙을 지키려고 세상과 단절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수도원은 깨끗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안토니오스(Antonios, 251~356) 수도원, 서방의 베네딕토(Benedictus de Nursia, 480~543)가 세운 수도원, 클루니 수도원 등은 오염되지 않은 약수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2세기에 와서는 기강이 무너지면서 클루니 수도원은 점점 쇠퇴하고 세속화되어 갔다. 수도원은 순전한 신앙을 지키는 데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을 이루는 무리들 역시 죄로 부패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밥을 굶어도 음란한 생각은 더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인간이다. 검소하게 살다가도 황금의 유혹에 순간 무너지는 것이 인간이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칼을 드는 것이 인간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중세를 방불케 할 정도로 타락했다고들 한다. 1517년 오염된 약수터(중세교회)를 통째로 뒤엎고 생수가 솟아나오는 새로운 약수터(종교개혁교회)를 만들지 않았는가. 중세 수도원과 중세 로마교회가 풍기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개혁자들이 목숨을 바쳤던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교회(목회자)는 내일의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107회기 총회도 가을을 맞았다는 글을 보았다. 과연 107회기 총회는 식수를 제공한 약수터 역할을 했는가를 묻고 싶다. 오염된 약수터를 찾는 사람은 없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오염된 약수터라면 통곡할 일이다. 부디 108회기 총회가 생수를 품어내어 한국교회를 정화하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교단이 생수가 솟아나는 약수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